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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0] '한진이 미군 수송장교들 살려준 셈'

-의외의 내용이군요. 한진이 미군 수송감을 살렸다니 금시초문입니다. “이런 얘기 아마 첨 들을 겁니다. 6·25 이후부터 60년대, 70년대까지도 그랬지만 미군의 모든 물자, 기름과 군수품이 전부 인천으로 들어왔어요. 그러면 미군 수송부에서 부평으로 수송하고 부평 보급창에서 문산, 동두천, 의정부, 그리고 서울에 보급을 했다구요. 그런데 그때 한국 사회가 엉망 아닙니까. 미군 트럭들이 부두에서 부평까지 보급품을 나르는데 중간에 반은 다 없어져. 한참 가다 보면 언제 귀신이 타고 있었는지 트럭 뒤에 타가지고 다 던지는 거요. 하하하. 미군부대에 도착해서 보면 반 남으면 잘 남은 거고 3분의 1이나 되나? 그러니까 미군들이 펄펄 뛰는 거지요. 보급창에 쌓아둔 기름도 어느 날 보면 ‘도라무통’(드럼통)이 저절로 구르네? 사람은 안 보이는데. 그걸 훔치느라고 땅굴을 뚫고 지하수 관로를 타고, 그야말로 별짓을 다 하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그런 시절입니다. 아마 그때 땅굴 팠던 놈들이 전부 북한으로 갔을 거야. 그러니까 초소가 있는데도 휴전선에서 땅굴을 귀신같이 팠지? 하하하.” -분실되는 것을 한진이 막았다는 겁니까? “막은 정도가 아니라 살려줬다니까요? 무슨 얘기냐, 전부 도둑을 맞고 그럴 때, 우리 조중훈 회장이 미군 보급창 대장을 만나 아이디어를 냈던 겁니다. 그게 한진이 수송사업을 하게 된 계기고, 미군 수송감들을 살린 거예요.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대장, 걱정하지 마. 내가 실어줄 게. 내가 수송 전문업자야. 물건 잃어버려? 그건 내가 변상해주겠어. 당신은 수송비만 내.’ 몇 t을 몇 마일 나르는 데 얼마다 하는 기준이 있을 것 아니겠어요. 그걸 내라는 거지. 그렇게 해도 도둑맞는 물자보다 수송비가 더 싸고, 물건을 잃어버리면 한진에서 돈으로 해주든가 물건으로 변상을 해준다는데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 보급창 대장이 생각할 땐 기가 막힌 제안이지. 그렇지만 반신반의해요.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물건으로 변상해?’ ‘양키시장에 가면 있잖우. 도둑맞은 건데 그게 양키시장으로 다시 나오지 어디로 가겠수?’ 하하하. 보급창 대장이 그런 조건이라면 좋다 이거죠. 도둑을 자꾸 당해서 죽을 지경이고 만날 얻어터지고 시말서 쓰고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거야. 그게 결국 수송감들을 살린 것이고, 한진이 미군 물자를 맡은 계기고, 월남에서 그때 인물들을 다 만났으니 미국 용역회사들이 있는데도 전부 물리치고 우리가 수송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기업의 성장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정부의 지원책을 제외해 놓고 본다면 한진은 기술력이나 자금력으로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해 거대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인맥이 밑거름이었고, 거기에 창업주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회 포착이 기술력과 자금력 이상의 힘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기업은 곧 사람이고 인맥은 곧 인연인데, 창업주부터 인맥을 중시했기 때문이겠지만 월남 진출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예외일 수 없다는 얘기로 들리는 부분이다. 조중건 고문은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한진그룹에서 드러내지 않고 있는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도, 어느 기업도 따를 수 없는 세계적인 인맥이라면서, 한진이 대한항공도 인수하고 오늘날의 한진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겉으로는 분명히 월남 전쟁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시작하는 셈이지만 내막적으로는 사람하고의 인연이 한진을 성장시킨 힘이었다는 것이다.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하려니까 얘긴데, 내가 버클리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편지도 써주고 장학금 알선도 해주고 그랬던 사람이 있어요. 우리가 월남에 진출할 때도 펜타곤에서 결정적인 정보와 도움을 준 사람인데 ‘레이칸(Laikan)’이라는 중령이 있습니다. 그 사람하고 오랜 인연이 따지고 보면 사실상 그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키운 겁니다. 내가 53년 당시 철원 5사단 포병부대에서 송찬호 장군하고 복무할 때 그 부대 고문관이면서 미 펜타곤의 연락장교로 와 있던 사람이 바로 레이칸 중령이에요. 닉슨 부통령도 직접 편지를 보내올 정도로 레이칸과 친해요. 그 사람하고 내가 전방에서 막사를 같이 썼어요. 영어를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레이칸도 내가 필요했지요. 좁은 천막 속에서 세 끼 식사 같이 하고 친형제처럼 생활했는데, 많은 사연이 있지만 그때의 인연이 결국에는 월남까지 숱한 도움을 주고 그랬거든? 그러니 한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겁니까.” 아마도 월남에서 레이칸과도 뭔가 이루어지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조 상무는 월남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보니까 정말 아는 사람투성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첫날부터 현장을 누볐다고 했다. 상황파악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미군이 한진을 위해 문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당시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미국에서도 천재라고 했을 정도인데 월남에 부두 시설이 전혀 없는 상태를 간과했다라는 것이다. “병력은 비행기로 투입될 수도 있고 걸어서라도 이동하면 되지만 보급 물자는 선박이든 비행기든 수송을 하면 즉각 하역이 돼야 전쟁을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역 시설이 전무하다고 할 정도로 엉망이더라구요. 그걸 고려하지 않고 막 쏟아 부었으니 말이야. 그러니 그게 전부 돈인데, 이 양반(맥나마라)이 한진을 위해서 모른 척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구, 하하하. 그래가지고 나로서는 좌우간 사람이 자본이고 막 밀어댈 작정이었으니까 부사령관부터 찾아 나설 판이에요. 솔직히 정부가 월남 참전을 결정한 건 우방을 돕고 반공을 하기 위해서지만 사업하는 우리는 전쟁하는 나라에서 돈 좀 벌어 경제부흥을 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어떡하든 일감을 콱 물어서 주머니에 넣는 게 장땡이란 말이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없어요. 친구가 써준 소개장은 신주 모시듯이 넣어놓고 그때 주월 대사가 신상철씨인데, 그분도 공군 소장으로 예편하셨는데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내셨고 대단한 분 아닙니까. 한 사람만 거치면 다 알잖아요. 인사를 드려놓고, 우선 한국대사관 바로 뒤에 있는 앰배서더 호텔에 숙소를 정했어요.” 그러나 조 상무의 친화력과 활약이 아무리 뛰어나고 인맥이 두터워도 미군만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10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9] 운도 척척···미군 친구가 병참 책임자 소개

월남을 제대로 치겠다는 얘기였다. 그것은 미군이 승리할 때까지 탄약을 비롯해 전쟁물자를 무한정 지원한다는 뜻이니 한진에는 넉넉한 일감이 있다는 암시였다. 사실이 그랬다. 파월 한국군이 68년 12월 28일 발표한 종합 전적만 해도 2년 동안 사살이 2만1000명이 넘는다고 했을 정도니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군이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을 테니 펜타곤의 전략물자 투입 계획은 사실적이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정부 보증까지 받아가며 새로운 장비를 대거 구입해 월남 진출을 계획해 왔던 한진인데, 출발 직전에 믿고 있었던 미군 인맥이 힘을 쓸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됐으니 조 상무로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치열한 전장에 뛰어들어 일감을 확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고 한진의 사운이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미국에서부터 오랜 친구였고 여차하면 ‘빽줄’로 생각했던 ‘하인카스’라는 부사령관이 월남에서는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아닌 전투담당 부사령관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조 상무는 맥이 쭉 빠지더라고 했다. 말하자면 수송을 담당하는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하나 더 있다는 얘기였다. “정신이 번쩍 나더라구요. 내가 급하면 하인카스 장군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헛짚었다 이거죠. 더구나 마이클 장군 이 친구도 빈소리를 하는 친구가 아니에요. 정확히 판단해주는 거지요. 자기가 모시고 있던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워싱턴에서 월남까지 에스코트해서 사이공에 모셔놓고 일부러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친구라고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월남 간다고 하는 마당에 허튼소리나 할 리가 있겠어요? 솔직히 눈앞이 깜깜해져요. 친구니까 좋은 데 가서 한잔하자고 그러는데 그 소리도 싱겁게만 들려요. 구정에 문 다 닫았지 좋은 곳이 어딨느냐고, 너도 헛짚었다고 꽥 소리치며 웃었지만 나는 속이 타는 거지요.” -하필이면 출발을 하루 앞두고 그런 소식을 들었으니 참 난감하셨겠습니다. “난감한 정도가 아니라 깜깜했지. 한진으로서는 첫 해외 진출이고, 더구나 전쟁 중인 나라에 대규모 수송 인력과 수송 장비를 투입하겠다는 상황 아닙니까. 우리로서는 사운을 걸고 많은 준비를 해왔고. 그런데 갑자기 기댈 곳이 없어졌다고 생각해봐요. 미칠 노릇 아니겠어요. 근데 참 희한해. 내가 사업은 운이 착착 맞아 들어가야 된다는 얘기를 했지만 때마침 그 친구가 서울에 오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했어요? 하인카스 장군만 믿고 덜렁덜렁 갔을 거 아니오. 물론 급하면 하인카스 장군한테 병참담당을 소개받을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사업은 그게 아니거든. 한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수송이니까 무조건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꽉 잡아야 되고 유대를 계속 해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그러자면 병참담당 부사령관이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소개를 받아야 돼요. 근데 마이클이 왔잖아요. 그 친구가 병참담당 부사령관의 심복처럼 가깝다고 했단 말이죠. 이게 운이에요. 자기가 대령 때 모셨던 장군이 ‘앵글라’라는 바로 그 병참담당 부사령관이라는데 그 친구가 내 옆에 앉아 있단 말이야. 그게 절묘하지 않아요?” -워싱턴에서 사이공까지 직접 동행해서 모셨다면 보통 사이가 아니었겠군요. “남녀 사이도 그렇게까지 하기가 어려운 거 아닙니까. 워싱턴에서 사이공이 어딘데. 그 얘기를 듣는데 머리를 탁 치는 거지, 하하하. 당장 소개장 하나 쓰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술집에 타이프가 있나? 펜도 없어요. 그래가지고 옛날 군인들이 보고서 올릴 때 쓰던 누런 종이가 있어요. 파란색 선이 죽죽 그어져 있고. 거기에 장군들이 겨드랑이 밑에 꽂고 다니는 노란 연필이 있는데 그걸로 좌우간 알아보지도 못하게 소개장을 꾹꾹 눌러 썼어요. 서로 막 웃고 말이지. 그걸 받아 넣고 다시 부탁을 했어요. 워싱턴에 돌아가면 앵글라 부사령관한테 나를 특별히 소개하는 텔렉스를 쳐 줄 수 있겠느냐고. 이중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는 거지요. 그랬더니 기꺼이 ‘슈어’. 그게 나중에 진짜 월남에서 먹히는 겁니다. 하하하.” 조 상무는 평소에 인적자원의 대부분을 형인 조 회장이 닦아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월남에서는 군 경력이 많았던 조 상무의 인맥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실토했다. -결과적으로 출발 전에 이미 병참담당 부사령관을 소개 받은 셈이니 절반은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마음이 좀 놓였던 건 사실이고, 인맥을 자꾸 얘기하면 거북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월남전에 뛰어들 때는 그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수송 얘기를 하기 전에 내가 장황하게 여러 가지 배경 설명을 하는 건 어떻게 돼서 미국 용역회사들도 있는데 다 물리치고 수송사업을 할 수 있었는지, 그걸 알아야 이해가 빠를 것 같아서입니다. 원래 운수업하고 산판업(山坂業)은 투기라고 했을 정도로 위험도 따랐지만 반은 운으로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상도 한진 편이 돼 줬다구요. 이게 무슨 얘기냐, 그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엉망이었어요? 그게 오히려 한진한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거지요. 얘기한 대로 나는 59년 11월에 귀국했지만 그 사이에 조중훈 회장이 57년부터 미군 군수물자 수송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때 집으로 초대하고 선물 주고 그런 것도 미군들하고 친목을 다지고 유대를 깊게 가지는 계기가 됐겠지만 그보다 미군 수송감들을 우리가 다 살려준 셈이라구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7-03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8] '여보, 나 내일 월남으로 떠나'

그러나 막상 떠날 때는 조 상무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쟁 중인 나라에 기업의 장래가 걸린 신작로를 닦으러 출정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심적 부담이 여간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집사람한테도 딱 떠날 때쯤 알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불안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짱도 생겨요. 내가 한국군에서 소금국도 먹어봤고 일선에도 가 있었고 미국 군대도 가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접시도 하루 2시간씩 닦아봤고 신문배달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는 인생의 밑바닥을 다 걸었는데 전쟁이야 한국전쟁도 경험했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거지요. 1월 22일이 구정입니다. 잔뜩 차려 먹고 내일 떠나는데 이젠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여보 나 내일 월남 간다.' 깜짝 놀라는 거죠. 더구나 전쟁을 하는 곳인데." -그걸로 작별 인사는 끝입니까? "끝이긴 이혼 당하는 줄 알았지. 하하하.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달래지만 그게 됩니까? 전쟁터로 간다는데. 기가 막히고 구정이고 뭐고 없어요. 미쳤다는 거지. 붙잡고 말리고 난리예요. 근데 우리 집안은 위계질서가 대단합니다. 형님이 금광에서 돈 냄새가 난다고 어느 정도 나는지 조사를 해보라고 해서 가는 거라고 그랬죠. 그랬더니 울다가도 아무 소리 못해 하하하." 실제로 한진그룹 창업주의 가족사는 재계에서도 어두운 소리 나오지 않고 화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조 상무는 모든 것이 '형수'에게서 나온다는 얘기를 했다. 객담일 수 있겠지만 경제인들과는 대체로 업무적인 얘기만 하다가 가족사를 듣게 되는 것은 퍽 흥미있는 일이기도 해서 일부를 소개한다. "우리 집안이 말이죠 우선 형수님부터 보면 서울토박이고 내가 알기에는 우리 형수님의 아버님이 경리 출신입니다. 옛날의 서울토박이라면 샌님이라고도 하지만 양반 기질이라는 게 꽉 자리 잡고 있잖아요. 거기다가 원칙적이고 깐깐한 그런 부친 밑에서 아주 철저하게 가정교육을 받은 형수님이라 시집와서도 집안에서 풍파를 일으키거나 어떤 문제로 시끄러운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했어요. 형제들끼리 싸운다? 아예 그런 일은 싹부터 잘라서 없게끔 만들고 내 기억에도 그런 문제는 일으키지도 않았고 전혀 없었어요. 서로 얘기할 게 있으면 다 하도록 하고 이해를 해서 풀도록 하고. 그래서 집안의 질서를 지키려고 정말 노력하고 애들 교육도 그런 쪽으로 아주 철저하게 시키고. 그게 안 됐으면 우리 형님이 기업을 일으키고 밖에서 그렇게 일을 하기가 어려웠겠죠. 집안이 시끄럽거나 우환이 있거나 하면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신경이 쓰이는데 무슨 일을 해요. 특히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건 가정적인 뒷받침 없이는 절대 될 수가 없지요. 더구나 형님은 만날 바깥으로 나가고 바깥에서 일을 만드는 분인데. 그런 걸 가만히 생각하면서 형수님을 보면 참 많이도 참고 희생하고 있다는 걸 여러 번 느끼게 되지요." 사실 조중훈 회장의 근엄하면서도 정적인 언행과 조중건 고문의 동적이고 사교적인 모습에서 재계 사람들은 형제만 봐도 부럽다고 했을 정도였다. 에피소드지만 두 형제를 비교하는 일화도 있었다. 형이나 동생이나 고객이든 회사의 중역이든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동의를 할 때 '예스(yes)'를 쓰지 않고 '슈어(Sure)'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래서 한때는 매우 긍정적인 의미의 '슈어'가 유행어처럼 한진그룹에 번지기도 했다. 외형적으로도 두 형제는 다른 면이 많지만 조 고문은 가령 비행기를 탔을 때 승무원들에게 뜨거운 것은 아주 뜨겁게 차가운 것은 아주 차갑게 하도록 주문하기로 유명했다. 식사는 물론 승객에게 손을 닦으라고 주는 물수건도 받는 순간 집어 던질 정도로 뜨겁게 해야 좋다는 것이고 커피도 혀가 델 정도로 해야 '잘했어' 그랬다. 조 회장의 장남인 조양호 회장은 예민하면서도 무척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조양호 회장은 위트 있고 거침없이 얘기하는 승무원이 되라고 가르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캐나다로 이민 갔지만 수더분한 여승무원하고 있었던 일화다. 어떤 나라의 전통음식이 나왔을 때 조 회장은 '이걸 만드는 나라에서는 침을 발라가면서 만든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여승무원은 거침없이 '그러면 제가 침을 발라서 만들어 드릴까요?'했다는 것이다. 조양호 회장이 손사래를 치며 막 웃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해왔다. -이제 월남 시장을 개척해야 될 상황이 왔잖습니까. 다소 심적인 중압감이 있었고 더구나 한진이 첫 해외 진출인데 어떤 준비를 하신 겁니까. "솔직히 준비는 타이프라이터 한 대밖에 없었고 어떻게 되든 일단 월남 땅을 밟고 보자 문제가 있으면 거기 가서 해결하자 그런 각오였어요. 그런데 나는 지금도 사업이라는 게 운이 참 중요하다 운이 따라야 하겠습디다. 아이디어도 있어야지만 사업은 운이 착착 맞아 들어가야 돼요. 무슨 얘기냐 하면 그날이 구정이고 마음은 무겁고 한데 오후에 전화가 와요. 노스웨스트 항공사 지점장인데 마이클 장군이 서울에 와서 나를 찾는다는 겁니다. 마이클은 그 시점에서 2년 전에 대령 달고 8군 수송감을 하다가 미국에 가면서 장군이 됐어요. 그 당시 직책이 뭐냐 미 육군의 전체 수송감이야. 대단하죠. 그 사람이 나를 찾는다는데 귀가 번쩍할 거 아닙니까? 당장 전화를 했지요. 나하고 굉장히 가까웠어요. 너 언제 왔느냐 지금 거기로 갈 테니 기다려. 그런데 구정이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술을 먹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내일 월남에 간다고 하니까 왜 가느냐고 돈 냄새 맡으러 간다 누굴 만날 거냐 제너럴 하인카스 부사령관이 내 친구 아니냐고 그 친구한테 도움을 받을 생각이라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대뜸 헛다리짚지 말라고 그러네? 일순간에 멍해지는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26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7] '한국 장병들이 김치 먹게 해달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미 9개월 전부터 통조림으로 된 야전식량(C-ration)을 연구했고 생산까지 완료해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만일 야전식량을 공급하게만 된다면 사기와 전투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누가 봐도 친서는 파월 한국군을 위해 대통령이 부식까지도 신경을 쓸 만큼 장병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애정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김치까지도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미국도 기꺼이 환대했다. 정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라마 국방장관 험프리 부통령과 함께 김치 C-레이션 공급 문제를 거론하자 즉석에서 '우리도 좀 먹어보자'고 했을 만큼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전하는 보도였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파병으로 우리의 반공이념과 우방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경제개발 자금을 벌어들이는 시장으로서 월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외화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날개를 퍼덕이는 분위기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이나 월남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른 셈인데 그럴 때 한진이 달러 금광을 캐겠다고 나섰으니까 비록 미국 펜타곤 친구들을 등에 업고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정부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로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을 생각했겠지만 조 회장은 그것과 함께 월남이 한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1월 1일이 우리 한진그룹 창립기념일인데 매년 그날이 되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감이 교차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러 역경이 있었지만 월남에 진출할 때나 빚더미에 앉아 있던 대한항공을 인수할 때 생각을 해보면 참 심각한 결단을 했구나 싶지요. 특히 월남은 전쟁터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눈에 금광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광이 무슨 소용 있어요. 캐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터인데. 그러나 기업의 기회는 변화에서 오는 거니까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각오하고 진출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개인이든 기업이든 1달러라도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니까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나가서 외화 가득을 하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정부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 없이 그게 돼요?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데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그만치 노력했고 그 위험한 포화 속에서도 신용을 지켜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의 한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월남이라는 무대에서 누가 더 주연급으로 활약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진 같은 그룹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한진 성장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중건 고문(전 부회장)도 한국의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월남 시장은 분명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동감할는지 모르지만 한국 경제가 돌기 시작한 것은 월남 파병으로 받은 군인들 봉급 또 한진 같은 유수한 기업들이 많은 외화 가득을 한 것이 원동력이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월남 파병을 안 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는 힘들었겠다 그걸 하면서 미국에도 큰소리쳤고 경제원조도 더 받았고 안보문제를 제기해 군사원조까지 더 받으면서 일어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데다가 월남으로 갔던 기업들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이것저것 외화 가득을 많이 해서 형편이 좋아지고 그게 다 밑거름이 된 거 아니냐 그 돈을 다 송금하고 산업에 투자해서 이만큼 발전을 가져온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분명히 월남은 지금 생각해도 은혜의 땅이었다구요." 아무튼 누구도 엄두를 못 내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길바닥이 우리 자산이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국내 운송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한진이 이제 월남 시장을 한진의 시장으로 평정하겠다고 나설 때 선봉대장을 자임한 인물은 조중건 상무였다. 물론 조중훈 회장이 쌓았던 경험과 닦아놓은 대로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조 상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유한 친화력과 미군 통역장교 시절 맺은 끈끈한 인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군의 물동량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완을 보였다.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어요. 이미 비행기도 편도 티켓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단 말이죠. 근데 솔직히 막막해요. 관광이나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심정이다 보니까 집사람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가방도 내가 챙겼어. 더우니까 반소매 작업복 한 벌 쑤셔 넣고 타이프라이터 하나 챙기고 돈 3000달러 준비하고. 비행기 표는 왜 편도만 가지고 가느냐 돌아올 땐 월남에서 번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지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1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6] '작전권 없이는 월남 안 가겠다'

작고했지만 김성은 전 국방장관은 전투부대 증파의 배경을 경제 측면에서 회고하기도 했다. 60년대에 국민 애창곡처럼 소리쳐 불렀던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가사가 국민 모두의 공감을 얻었지만 박 대통령은 늘 '잘살게 해 보세 잘살게 해 보세'라면서 정부 각료들을 다그쳤다고 했다. "월남전이 터진 그때가 6.25를 치르고 나서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100%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잖습니까. 그 무렵에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85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빈곤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밀가루니 식용유 같은 것까지 미군이 갖다 줘서 우리 군대가 유지됐고 우리 국민도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라고 해서 밀가루 옥수수 이런 것들을 갖다가 먹고 살았던 겁니다. 국방비도 그걸로 사용했다구요. 그런데 안보까지 위험하지 않았습니까. 이북이 중공하고 상호방위조약이 되어 있고 소련하고도 상호방위조약이 돼 있고. 그래서 미군 2개 사단이 그때 한국을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2사단하고 7사단이오. 5만 명 가까이 주둔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뭐 미국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루 생존도 어려운 상태였어요. 그럴 때인데 미국이 월남전에 본격적인 개입을 결심하고 나서 우리한테 특별히 병력을 증파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김성은 전 국방장관) 이런 상황에서 채 사령관은 기업들과 민간 파월 기술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군만의 작전권을 확보했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도 자칫하면 확보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사령관으로서 부임하기 직전이지요. 청와대에 들어가니까 박 대통령께서 '가거든 미군사령관 지휘하에 들어가서 임무수행을 하는 게 좋겠다'. 맨 먼저 이 말씀부터 하시더라구요. 깜짝 놀랐죠. 그래서 내가 명령 불복종이 된다면 군복을 벗겠다 작전권이 없다면 가지 않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 드렸다구요." -이유를 설명했을 것 아닙니까. "6.25 때는 우리가 미군 지휘 아래서 작전을 했지만 월남은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침략을 받고 있는 자유 월남을 도와주러 간다는 건 정치적인 명분이 있는데 그렇다면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해야 우리도 정치적인 명분이 서지 이 전쟁이 미국의 청부전쟁도 아닌데 미군 지휘 아래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확실히 못을 박아 버렸다구요. 절대로 미군 지휘 아래서는 작전할 수 없다고 말이죠. 우리가 작전권을 가져야 우리 장병들 사기도 올려 줄 수 있고 우리 기업들의 신변보호도 가능한 거라구요. 작전권이 없는데 어떻게 장병이든 기업이든 민간기술자든 보호를 합니까?" -박 대통령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디까. "아주 곤란한 표정을 지으시더라구요. '큰일 났다. 내가 브라운 대사하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러시더군요. 물론 대통령의 뜻은 알지요. 우리가 실탄 하나 식량 하나 심지어 가고 오는 것까지 전부 미군 항공모함을 이용하고 헬리콥터다 탱크다 그런 것까지 전부 미군의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미군 지휘 아래 있어야 잘해 줄 거라고 생각하신 건 백번 옳은 말씀이에요. 그렇지만 월남은 전쟁 양상이 특수하다구요. 굴 속에 베트콩들이 잠복하고 지역전을 치러야 할 때도 숱한데 전체적인 작전만 가지고 돼요? 전선이 없고 후방에 적이 더 많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작전도 특수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죠.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말씀이 없으시더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시더라구요. '국가원수가 상대방 대사에게 말씀하신 건 취소할 수 없으니까 일보 후퇴해 주십시오. 월남의 전쟁양상은 특수하니까 세부사항은 양군의 군사령관이 만나서 결정하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랬지요. 그래서 앞에서 얘기했듯이 미군 사령관 스몰렌 대장하고 공군사령관 브라운 대장 깐깐한 라슨 장군을 만나서 굉장히 싸웠지만 우리 입장을 관철시켜 작전권을 확보했던 것 아닙니까. 그게 없었으면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 돈을 벌고 우리 기술자들 신변을 어떻게 보호합니까." 뒤에 한진이 수송과 하역 용역을 통째로 미국 회사에 빼앗기게 될 위기상황도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월남전을 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는 시장으로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한진의 입장에서는 늘어나는 병력 숫자만으로도 표정 관리를 해야만 될 일이었다. 실제로 형(조중훈)의 부탁을 받고 실패하면 귀국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왕복 티켓이 아닌 편도 티켓만 들고 월남으로 향한 당시 조중건 상무는 역시 형이 살피고 돌아와서 했던 얘기가 실감될 정도로 하역과 수송 물량이 황금 광맥처럼 줄지어 쌓여 있었다고 했다. 조 상무 얘기다. "부두에 가 보고 다 돌아보니까 엉망진창이고 형님(조중훈) 말이 틀림없는 겁니다. 처음 월남을 둘러보러 가셨는데 금광이 바다 위에 떠 있더라면서 네가 가서 보자기에 싸 오라고 했단 말이죠. 금광을 아예 통째로 보자기에 싸 오라 이거죠 하하하. 그러면서 한국에서 친했던 미군들이 월남에 다 가 있으니까 너만 가면 전부 반길 거다 그거예요. 가서 보니까 진짜 사이공 아니면 퀴논에 다 있어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12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5] '한국에 큰 경제적 이익 주겠다'

66년부터 한국군의 파병은 무섭게 증가했다. 어찌 보면 미군의 대리전처럼 비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군 증파에 대해서는 존슨 미 대통령이 감사할 정도로 급속히 이루어졌고 숫자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71년에 발간된 존슨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65년 여름 그 당시 15개 미 전투사단 7만5000명이 베트남에 주둔해 있었다. 맥나마라(미 국방장관)는 34개 사단 증원을 건의해 왔다. 만약 한국이 7개 사단 파병을 해 주지 않았다면 미국 병력 수준은 17만5000명 내지 20만 명으로 늘었을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회고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더라도 65년에 이미 미군 15개 전투사단이 주둔해 있는 가운데 곧이어 한국군 7개 사단이 파병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점까지 최소 10만 명 이상의 우리 장병이 전장에 투입(약 8년 6개월 동안 32만여 명 투입)됐다고 본다면 군사 측면을 떠나 한진 입장에서는 그만큼 장사할 수송 물량이 늘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군 7개 사단이 미군 34개 사단이 맡아야 될 정도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다는 부분도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군의 참전 지역이 그처럼 넓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월남의 전장 전체가 한진의 시장이었다고 유추해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 물론 한국이 본격적인 전투부대 증파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66년 1월 1일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서울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한국군 증파 문제는 비록 한진의 조중훈 회장 말처럼 '사업가는 사업성이 있느냐만 파악하면 되는 일이지 정부가 월남에 무슨 목적으로 파병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는 냉정한 발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부는 한국군을 통해 한진을 포함한 파월 민간업자들을 보호해야 했던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간략히 살펴 둬야 할 것 같다. 이미 언급했지만 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국내 문제와 함께 북한 공산당에 당했던 한국전쟁을 생각할 때 공산주의자를 지구상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싸우는 미국을 당연히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한의 남침으로 미군 1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한국 전선에서 발생했는데 미국이 증파를 요청하는 마당에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6.25 남침으로 유엔 16개국의 수많은 젊은 장병이 희생되고 1000만 이산가족이 생기게 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에 와서 아직도 사과 한마디 없는 북한에 한국이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을 돕는 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모한 온정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어쨌든 서울로 날아온 험프리 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국이 월남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50만 명의 병력이 투입돼야 한다면서 한국이 1개 사단을 추가로 증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는 일본보다 당연히 한국에 더 큰 경제적 이익이 돌아가게끔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호사단의 잔류연대 혜산진(惠山鎭)부대와 백마부대 등 4만5000 병력이 추가 증파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한진을 포함한 우리 기업들과 민간 파월 기술자들이 월남 시장을 마음껏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신속한 파병이라든지 증파의 숫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존슨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한국군 7개 사단이 미군 34개 사단과 맞먹는 전투력을 지녔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독자적인 전술과 한국군만의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채명신 장군과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성은 전 장관도 인터뷰를 통해 같은 증언을 했었다. 독자적인 작전권을 확보하지 못했으면 우리 기업들과 파월 민간업자들을 보호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였다. 증언의 일부 내용을 공개한다.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장군은 박 대통령을 만난다. 이미 육본 작전참모 부장으로서 비둘기부대 파병문제를 직접 다뤘던 그는 전투부대를 파병할 때도 박 대통령 앞에서 가장 먼저 논의한 것이 작전권 문제였다. 월남전이 발발했을 당시 채 사령관은 미군이 평화유지를 위해 비전투부대를 보내지 않고 만의 하나 전투부대를 월남에 파병한다면 한국도 전투부대를 보내는 것은 불가피하겠다는 예상을 했었다고 했다. -왜 그렇게 예상하신 겁니까? "6.25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데 6.25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김일성이 5년 동안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군사력 증강에 광분해 압도적인 군사적 우세를 지니자 기습으로 남침해 온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때 일요일이라 전부 외출하고 장교클럽에서는 전방에 있는 연대장 사단장까지 불러다가 술 마시고 댄스파티 하고 아가씨 끌어안고 춤추고 25일 새벽 2시까지 그 짓하고 있었거든요. 그러고 2~3시간 후에 적이 쳐들어왔잖아요. 그땐 곤드레만드레 돼 가지고 육군 사령부 고급장교들은 전부 술에 나가떨어졌고 일요일이라 장병들은 외출 보내거나 농번기라고 해서 시골로 다 휴가 보내고 실지 병력은 반도 안 남아 있었단 말이죠. 그때 북한 괴뢰는 탱크 전투기 120㎜대포를 막 갈겨대며 기습적으로 남침해 왔잖아요. 그러니 우리 전투부대는 거의 괴멸된 상태지요. 그러니까 부산까지 그냥 진격해서 내려가면 끝이에요. 그러면 그걸로 대한민국은 끝장나는 겁니다. 그때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것이며 그때 싸운 상대가 공산주의자들 아닙니까. 똑같은 상황이 월남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거기에 미군이 비전투부대를 넣겠어요? 당연히 우리로서는 미군을 도울 수밖에 없고 전투부대를 원할 거라고 예상한 거죠."〈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6-05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4] 편도티켓 들고 죽을 각오로 떠나

마침내 한진은 조중건 상무를 앞세워 월남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듯 조중훈 회장이 45년 11월 '한진상사'를 창업했지만 그 전에는 자동차 피스톤을 재생해 판매하던 '이연공업사'라는 소규모 공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이 모든 산업시설을 군수지원 체제로 묶었고 조 회장도 피스톤 수리공장을 닫아야 했다. 그 후 해방과 함께 한진상사를 만들어 무역업과 수송사업으로 성장했지만 그래도 급성장의 무대는 월남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현장을 지휘하는 미군 사령관들을 만나 교섭하는 것은 조중건 상무의 몫이었다. 그는 66년 1월 23일 왕복 티켓도 아닌 편도(출발) 티켓만 손에 쥐고 성공하지 못하면 월남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떠나는 것이다. 친화력이 뛰어난 조중건 대한항공 전 부회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형(조중훈)이 다져놓은 바탕 위에서 나는 재주를 부렸을 뿐'이라며 형에 대한 애정부터 나타냈다. "그 양반(조중훈)이 머리가 참 비상합니다. 나하고 열두살 차이의 형님인데 같은 원숭이띠예요. 원래 엔지니어인데 휘문고보 3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져 해양대학의 전신인 진해해원양성소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2등기관사 면허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손재주가 아주 좋습니다. 집에서 라디오 재봉틀 같은 게 고장 나면 직접 다 고치고. 자동차 피스톤 공장을 한 것도 그런 재주가 있으니까 했던 겁니다. 물론 배도 탔지요. 외항선을 탔는데 1940년대에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를 쭉 다니면서 그때 세계가 이게 아니구나 정말 여러 가지 식견을 넓혔을 거예요. 그런 양반인데 한진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는 직접 들으셨을 테니 잘 알겠지만 나하고 펜타곤에 갔다가 식견이 넓으시니까 월남에 금광이 있다고 내다본 겁니다. 그게 사실상 시작입니다." -부회장님은 언제부터 월남에 뛰어드는 겁니까. "비서실장 겸 상무 때지요. 내가 53년 6월에 유학 장교로 미국 가서 미 포병학교 교관으로 2년 다시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까 미국에서 6년 동안 있다가 59년에 돌아왔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좋은 장군들 만나고 친구들 사귀면서 아주 좋았는데 와서 보니까 그때 한진의 1년 외형이 70만~80만 달러밖에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로서는 적은 돈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미국에 있을 때 형이 벤츠 타고 다닌다고 자랑해서 굉장히 버는 줄 알았거든. 하하하. 하여간 내가 귀국하면서 같이 일을 했는데 60년에 보니까 수송으로 약 170만~180만 달러가 되고 무역까지 228만 달러를 벌었어요. 그때 삼성이 제일모직.제일제당 한국유리가 판유리 공장 이런 걸 했고 우리는 수송을 중심으로 했지요. 운송부문에서는 최고였어요. 그러면서 61년에 서울~인천 간을 운행하는 고속형 한진버스 사업을 한 겁니다. 누구도 생각 못했을 때 아이디어였지요. 그러다가 월남파병으로 시끌벅적하니까 이 양반이 펜타곤에 가자고 하시더니 66년에 월남 가라고 하잖아요. 하하하." 조중건 상무를 미국인들은 '찰리 조'라고 불렀다. 어쩌면 한국인보다 미국인들이 그를 더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미국 생활에서 보여준 그의 친화력 때문일 것이다. 본인도 부인하지 않았다. "나야 한국군에서 통역장교로 2년 미국 포병학교에서 교관으로 2년 버클리대학에서 4년. 그러니 한국군도 알지 미국 군대도 알지 대학도 미국에서 다녔으니까 월남 가서 수송 물량 교섭하라는 형님 얘기는 당연한 거지요. 미국 사람 만나봐야 미국 대학 나왔을 거고 미군들 만나봐야 포병학교 출신 아니면 보병이거나 수송병과일 텐데 한 사람 건너면 다 아는 거 아닙니까? 거기다가 형님이 수송 사업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월남에도 많이 있을 거고. 그러니까 안 될 일이 없겠다 싶은 거지요. 한국군도 웬만한 장군들은 거의 미국 포병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구요. 내가 박 대통령도 광주 포병학교 때부터 잘 알았지만 나중에 미국 포병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마침 거길 유학 오셔가지고 6개월을 같이 있었어요.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미국에서 고생한다고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그러셨어요.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는데…." -국내서 통역장교도 하셨고 포병학교 교관까지 하셨으면 군 인맥이 상당했겠군요.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 국군의 역사이기도 한데 5.16 때 박 대통령과 행동을 같이했던 많은 사람이 사실은 광주 포병학교 출신들이에요. 그게 어떻게 된 건가 하면 그때가 52년이지요. 많은 고참 대령들이 광주 포병학교에서 단기 특별교육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군사고문단이 볼 때 전쟁은 해야 하는데 한국군 화력이 엉망인 겁니다. 화력이 전혀 없었잖아요. 한국군을 보강시켜야 되겠는데 전차부대도 없지 포병도 없지 굉장히 고민했다구요. 원래는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가 지원을 해 줘야 되거든요? 3개 대대가 실전을 하고 1개 대대는 예비대대로 있어야 되니까요. 근데 포병이 1개 대대밖에 없었단 말이죠. 그래서 미 군사고문단에서 1개 사단에 4개 포병대대를 만드는 겁니다. 급조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이 있어요?" -사람이 없다니요 무슨 얘기입니까? "그때까지 포병은 워낙 TO가 조금밖에 없었기 때2 겁니다. 그게 배경인데 그때 박경원(전 내무부 장관) 이기건 김동빈 송석하 그런 분들이 광주에서 특별교육을 받은 거예요. 박 대통령은 광주 포병학교에서 교관을 했고. 나중에 총무처 장관을 지낸 심흥선 그분은 교장을 했고 국방장관을 지낸 노재현 장군은 부교장으로 계셨죠. 그때 내가 광주포병학교에서 심흥선 교장의 보좌관 겸 통역관으로 있었으니까 자연히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될 거 아닙니까. 그런 인연으로 한국군도 웬만하면 다 아는데 5.16 일어나고 나중에 보니까 전부 아는 사람들이지 뭡니까 하하하." 한진은 운을 타고난 셈이었다. 찰리 조로 알려진 조 상무가 마침 귀국해서 한진에 있었다는 것도 이미 짜여 있는 운명의 설계도처럼 착착 손발이 맞아 들어갔지만 한진이 월남 진출을 결정했을 때는 미군의 투입도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다. 군 병력이 대량 투입된다는 것은 그만큼 하역과 수송해야 할 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한진으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인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2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3] 박정희, 김용태에 '전황 파악' 밀명

한진이 정부의 각종 지원과 국가보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의 물자 수송과 하역을 포함한 운송사업을 해 온 실적이 당시로서는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조중훈 회장의 회고대로 장기영 부총리와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었다. 사실 조 회장은 트럭이나 굴리고 물자나 수송하는 운송업자로만 기록될 인물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정부 문제를 해결하는 막후 인물로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훗날이지만 서울지하철 건설 때 정부는 애초 프랑스의 자문을 받아 모든 계획을 세우고 설계를 하면서 준비했다. 그랬음에도 객차차량을 놓고 뒤늦게 뛰어든 일본과 프랑스가 첨예한 수주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당시 집권당의 재정위원장을 비롯한 정치권이 개입하고 집권 공화당에 정치자금이 유입됐다는 등의 석연치 않은 문제로 일본에 낙찰되자 프랑스는 한국이 반대하는 북한의 WHO(세계보건기구) 가입을 오히려 지원하고 한국과 외교 단절까지 언급하면서 분노했다. 그때도 김종필 총리의 특명을 받고 프랑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조 회장이 맡아서 해결했다. 그리고 장기영 부총리 시절인 60년대 무렵에도 조 회장은 정부를 위해 큰일을 해치운 것이다. 정권이 위태로울 정도로 극심한 식량파동을 겪고 있을 때인 64년 무렵.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3분(밀가루.설탕.시멘트) 폭리' 사건으로 대통령 선거 때 밀가루 부대가 뿌려졌을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 633만9000달러어치 소맥을 사들여 대선에서 밀가루 부대를 집집마다 뿌린 것은 신임 장기영 경제팀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정부의 위기였다. 민주당과 민정당 등 정치권이 궐기하고 요동을 치는 상황까지 갔고 미국까지 나서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추가원조 1500만 달러를 취소하겠다는 압력을 가해 왔다. 추가 원조가 끊긴다면 정부는 외교적인 고립까지 초래해 최대 위기를 맞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럴 때 장 부총리의 부탁을 받고 나선 인물이 조 회장이었다. 한일국교가 수립되기 전인데도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 2000만 달러의 경제협력차관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껄껄껄. 그런 일이 좀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게 64년 일이잖아요. 사실 2000만 달러가 없었으면 미국의 압력에 대응하기도 어려웠고 정부가 곤경에 빠졌을 거예요. 그때 다나카 의원이 대장성 장관을 하고 있었는데 그 장관이 나를 도와준 거지요. 일본 각의에서 차관을 통과시키느라고 애를 썼으니까. 그때 나도 쇼를 좀 했지 껄껄껄. 장 부총리가 특별히 부탁을 하니까 민간외교관 노릇을 좀 했던 건데 월남 진출하고는 관련이 없는 거니까 그런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껄껄." 어쨌든 조 회장은 펜타곤 방문 이후 정부가 기대한 이상으로 달러를 벌어들일 기세였다. 실제로 민간 수송부대가 월남에 대거 투입됐을 때는 전쟁물자를 실어 나르는 장비도 중요했지만 민간인력 자체가 달러박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물론 한진만 인력수출로 달러를 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 현대건설의 경우는 준설공사 등으로 돈을 벌기도 했지만 세탁공장을 운영해 큰돈을 만졌다. 말이 공장이지 세탁소나 다름없는 기능이고 기술만 있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세탁기술자로 채용했다. 군인들만 보이는 뜨거운 전쟁터에서 군복 세탁은 큰 자본 들이지 않고 몸으로 버는 장사였다.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나트랑에 2개 퀴논에 3개 캄란에 2개소를 열어 68년부터 3년간 548만9000달러를 벌어들였다.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로 손해를 본 것에 비하면 오히려 세탁공장 운영이 중요한 수입원이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인력수출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자금줄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만약 월남전이 2차 5개년계획이 끝나는 71년이나 72년까지만 계속된다면 5개년계획 내용을 수정하거나 앞당길 수도 있겠다는 박 대통령의 구상이 그래서 나왔던 것이다. 실제로 전황 파악을 위해 박 대통령은 김용태(전 장관) 국회 국방위원을 은밀히 월남으로 밀파하기도 했다. 작고했지만 김 의원이 생전에 필자에게 회고한 내용에는 박 대통령의 경제적 실리 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어른이 경제개발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처음 파병할 때는 의리를 생각해 미국을 도와야 한다고 하더니 달러가 막 들어오니까 마음이 달라졌어요. 한창 전쟁 중인데 월남으로 들어가 인력활용을 살펴보고 오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미국에 들러 미군이 언제까지 폭격할 건지 알아보래요. 오래 할수록 좋다 이거지 하하하. 그때 정부에 돈이 뭐 있어요? 월남에서 벌어들이는 달러가 사실상 개발자금입니다. 그런 형편이야. 워싱턴에 도착해 당신들이 언제까지 북폭(월맹)을 할 거냐 왜 그러느냐 그걸 알아야 우리가 파병을 더 확대할 건지 말 건지를 검토할 거 아니냐 이랬더니 미 국방부에서 다 알려줘 하하하. 그런 다음에 비둘기부대 영내에 내 숙소를 준비하도록 연락해 놓고 내일이면 월남으로 떠나는 날이야. 난데없이 데이비드 기자가 알아가지고 한국의 김용태 의원이 박 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월남 간다고 전 세계에 타전해 버렸어요. 아이고…. 청와대에 연락하니까 그래도 들어가라잖아. 우리 인력을 더 투입할 시장이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보라 이거예요. 월남에 도착하니까 거리 벽에 내 얼굴 붙여놓고 베트콩들이 현상금을 걸어놨어. 보는 즉시 사살하면 현상금 준다고 말이지. 그런 난리를 치면서 월남 달러를 경제개발에 최대한 활용한 겁니다."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22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2] '계약 할테니 300만달러 위약금 걸어라'

물론 한진에 관한 자료는 예상 외로 미국 펜타곤 서류함에 가득 보관되어 있더라고 했다. 한국에서 미 군수물자들을 수송할 때 무엇을 했고 어떻게 얼마에 했다는 것까지 전부 파일로 보관해 뒀더라는 것이다. 미국이 신뢰하고 있었던 셈이다. "당신이 원하면 수송하는 일감을 주겠다 계약을 해주겠다. 다만 주는데 조건이 있다. 월남에 장비를 가져오너라. 그걸 약속하는 의미로 300만 달러를 걸고 계약을 하자. 이게 핵심입니다. 첫 방문에서 아주 쉽게 약속을 받고 곧바로 계약을 했지요. 300만 달러는 위약금으로 걸어놓는 돈이지만 조건의 핵심이 장비이기 때문에 좋은 장비를 그만큼 가져오라는 얘기고 그렇게 하면 물량을 주겠다는 얘기예요. 그 당시 300만 달러면 대단한 금액입니다. 그렇지만 수송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나갈 노동력을 생각해 보세요. 그때는 모두가 근면했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300만 달러로 시장을 열 수 있다면 큰돈도 아니고 분명히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지요. 더구나 버리는 돈도 아니고 장비 구입인데. 일단 귀국해서 펜타곤에서 있었던 일을 정부에 보고했어요. 이런 일이 있으니까 우선 정부에서 월남 정부의 양해를 좀 구해주시오. 그게 우리 땅이 아니잖아요. 점령지도 아니고. 그러니 우리 근로자들과 장비가 들어간다고 월남 정부의 양해를 구해야 될 거 아니겠어요. 뭐 그렇게 해서 시작을 한 겁니다." -두루뭉술하게 말씀하시니까 쉽게 된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면 국내에서 특혜 문제는 왜 나온 겁니까? "껄껄. 정부 보증 때문이지요. 그땐 특혜가 될 수도 없는데 정부가 한진 문제로 긴급회의도 하고 그러니까 업계에서 누가 특혜 얘기를 좀 했어요. 하여간 300만 달러가 적습니까? 우린 그런 돈이 없었어요. 그걸 정부가 보증해 달라는 거지요. 솔직히 정부가 보증을 해주지 않으면 한진이 주저앉게 되는 그런 계약을 했어요. 배짱도 컸지 껄껄껄. 그 얘기를 하자면 장기영씨 그분이 그때 부총리 아닙니까.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장기영 부총리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한 겁니다. 하여간 그분에게 보증 얘기를 했더니 너무 놀랐는지 처음엔 눈만 껌벅거리고 말이 없어요 껄껄껄. 그러더니 딱 한마디야. 각하밖에 못해요 이러잖아요." -어떤 내용으로 계약을 했는데 정부 보증이 필요했습니까? "일감을 주는데 장비를 가져오라는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일은 1966년 5월 15일 이후부터 하기로 하고 300만 달러를 걸고 쌍방계약을 하자 장비를 못 가져 와서 일을 못하면 한진이 300만 달러를 위약금으로 물고 만약에 미국 측에서 작전상 필요 없어서 계약을 취소하면 300만 달러를 한진이 받기로 그런 계약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보따리 장사는 안 되고 제대로 된 장비를 가지고 들어와라 그거거든? 그러니 일감은 확실하게 확보를 해주는 반면 우리도 확실한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서 전쟁물자를 작전에 차질이 없도록 신속히 수송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쌍방계약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꼼짝 못하는 거지요 서로가. 그런데 돈이 있나. 장비를 구입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실은 그 계약서를 가지고 귀국길에 홍콩에 있는 미국 은행부터 찾아갔어요. 융자를 받으려고. 거기서 계약서를 쭉 보더니 좋은 계약이다 이거예요.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300만 달러 융자를 해줄 용의가 있는데 단 한국 정부의 개런티를 받아와라 담보도 없이 돈을 그냥 줄 수는 없으니 정부 보증서를 가져오라 이거지요. 말은 맞지. 그렇지만 우리 정부가 그 당시에 상당히 어려웠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장기영씨도 해줄 수가 없었어요. 더구나 계약은 해왔지만 계약서에 사인한 것밖에 더 있어요? 그땐 솔직히 전쟁터에서 어떻게 될지 내일을 모르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습니까.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자유중국(대만)을 방문하셨던가? 그랬는데 만나 뵙고 여차여차해서 수송시장을 뚫었지만 정부 보증이 없으면 결국 계약도 파기되고 월남에 나가서 일도 못하게 된다고 부탁을 드렸어요. 1965년에 한일국교가 됐지요? 그때 정부의 가용외화가 얼마냐 하면 4700만 달러밖에 없었어요. 대한민국 정부가 쓸 수 있는 달러가 그 정도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그 숫자를 내가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도 난감하시지. 그런데 하시는 말씀이 '가서 용감스럽게 해라.' 껄껄껄. 해주겠다는 말씀은 안 하시고 용감스럽게 하래요. 박 대통령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은 분입니다. 결국은 해주겠다는 말씀인데 부총리도 있고 정부 보증은 절차가 있으니까 신중하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장기영 부총리로서는 대통령의 언질이 있었으니까 동력이 붙었겠군요. "장기영씨한테 얘길했더니 나하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지만 좋아서 신이 났어요. 그런데 대통령을 만나느라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계약한 날짜는 촉박하고 아주 급하게 됐어요. 언제 어느 날까지 장비를 넣기로 했는데 날짜를 못 지키면 계약상 7만 달러가 달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다고 했더니 나중에 재무장관을 했지만 황종률씨가 그때 재무차관인가 그랬는데 일요일에 한국은행에서 이사회를 열었어요. 일요일에 이사회 열었다는 얘기 들어봤어요? 처음 듣죠? 전무후무한 얘기일 거야 껄껄껄. 그것 때문에 내가 황종률씨한테 굉장히 싫은 얘기 들었다고. 중앙은행을 어떻게 보고 일요일에 긴급 이사회를 열게끔 했느냐고 말이지. 하여간 그렇게 한 덕분에 한국은행에서 개런티를 해준 걸로 융자 받고 장비 실어내 가면서 월남으로 나가게 된 거지요. 그때부터 5년 반 동안 우리 한진그룹이 정말 열심히 해서 엄청난 외화로 국가경제를 도운 겁니다. 껄껄껄."〈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14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1] 조중훈 회장 '펜타곤 직접 가 계약땄지'

60년대의 한국-. 그것을 극명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저울대는 없다. 그러나 단적으로 무게를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다. 65년 10월부터 본격화되는 청룡과 맹호의 전투부대 파병이 시작되면서 마땅한 세계 수출시장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그나마 믿는 시장은 월남이었고 66년 국가의 수출 총 목표액으로 잡은 것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이 목표액을 달성해보려고 정부는 강력한 '수출진흥정책'을 뒷받침하기까지 했다. 2억5000만 달러를 벌기 위해 정부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지금은 웬만한 중소기업 하나만 해도 2억5000만 달러 수출을 하지만 그런 정도가 60년대 한국의 경제 체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한진의 월남 진출 계획은 성사만 된다면 더없는 기회였다. 이미 조중훈 회장(당시 사장)의 눈에는 황금을 캘 수 있는 광맥이 월남에 있다는 것이 보였다니까 일찌감치 혜안을 가진 셈이었다. 조 회장은 채명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맹호사단이 전부 천막에서 지내고 있더라면서 회고를 계속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다가 도착해서 다시 퀴논 항에 가보니까 부대로 수송이 안 된 짐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어요.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니 미군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게 전부 전쟁물자인데. 장병들에게 지급할 보급품도 전쟁물자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첫눈에 이건 금광이다 그래가지고 귀국 후에 정부에도 얘기하고 동생(조중건)을 보내고 그랬지요." -월남을 방문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파병을 한다고 난리를 칠 때지요. 내 입장에서는 가기만 하면 뭘 합니까. 실리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사업 차원에서. 근데 전쟁하고 수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어야지. 파병은 하는데 전쟁이 어떻게 언제까지 갈 건지 그런 정보를 알아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월남을 가기 전에 먼저 미국을 갔어. 그때가 65년 8월이에요. 내가 57년부터 미군 수송을 했거든? 말하자면 한국에서 개척을 한 거지요. 미군 수송을 한국 업자가 맡은 것은 우리가 최초니까. 그러니 수송 장교들 고급장교들 다 알기 때문에 미국 펜타곤(미 국방부 본부건물)을 두드렸어요. 아니나 달라 전부 아는 얼굴들이야."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간부와 사귀셨습니까. "껄껄. 내가 어째서 고급장교들을 많이 알게 됐느냐 우리가 수송을 하면서 미군을 접촉할 때만 해도 미군 장교들이 한국 사람을 생각할 때 남자는 전부 도둑놈이고 여자는 '양갈보' '양부인'이고 집은 '하꼬방'이라는 시각으로 봤어요. 50년대 초기에는 다 그랬습니다. 미군과 얘기를 해보면 그때는 한국 사업가들이 지프를 타면 최고였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저것도 도둑질한 지프 타고 다닌다 이거예요. 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그 사람들 선입관이 그랬어요. 불쾌하지. 그래서 나는 57년에 벤츠를 타고 다닌 거예요. 심리적으로 미군들 사고방식을 눌러가면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니까 나를 다시 보는 거야. 그때부터 백만장자가 아니더라도 백만장자의 매너를 가져야 되겠다 하는 게 내 사고방식이 됐어요. 왜 미국이 알다시피 자본주의 국가인데 백만장자라면 우러러보거든. 집에 와서 봤을 때도 돌멩이로 근사하게 꾸며놓고 정원이 넓고 하면 할리우드 배우 집은 아니지만 꺼벅 죽거든 껄껄껄. 8군 장교니 뭐니 내가 대접도 받아봤지만 집으로 초대도 많이 했어요. 대접을 받으면 해야 되잖아요. 특히 고국으로 돌아가는 장교들 일이 끝나고 본부로 귀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초청했어요. 그러면서 임무 끝나고 가니까 네 와이프한테 주라고 선물도 꼭 했고. 그렇게 10여 년 가까이 한 5000명을 초대했지요. 그러니 친구가 많을 수밖에. 펜타곤에 가보니까 수송 장교들은 전부 반갑게 환호하고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묻고 전부 우리 편이야 껄껄껄." 사업하는 입장에서는 특히 미군의 파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구조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미국 경제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돼있던 것이 당시 한국의 경제 형편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한국 경제는 미국의 영향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행보를 하기는 어렵게 돼 있다. 무역적자와 흑자의 향방이 달러 가치와 원유가 미국의 성장률 그리고 미국 산업의 경쟁력에 따라 달라지게 되어 있으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월남이 미국에 의존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구나 미국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의 수송업자로서는 월남에 진출할 수 있는 지렛대를 펜타곤에서 얻게 된다면 여간 큰 후원 세력을 등에 업는 게 아닌 셈이었다. 조 회장은 펜타곤에서 지원 약속을 받으면 무리하지 않고도 시동을 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물론 덩치가 큰 만큼 추진하기가 만만한 일은 아니었고 정부 협조 없이는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조 회장은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털어냈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한진이 정부 특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수출진흥에 정부가 총력을 쏟은 그때는 그런 큰 수송사업을 할 수 있는 업체가 한진 외에는 없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외화벌이의 첨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사귀었던 장교들을 펜타곤에서 만났을 때 월남에서도 한진의 역할이 있다는 걸 인식시켰습니까? "당연히 얘기를 했지요. 정보를 얻겠다고 갔지만 한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람 대부분이 수송 담당 고급장 교들이고 그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내가 얘기를 안 해도 왜 왔는지 알았을 거예요. 그만큼 친하게 지냈고. 미군이 그때 한 200만인데 고급 수송 장교라는 건 국한되어 있잖아요. 진급을 했어도 병과를 바꾸지 않으니까 여전히 수송 담당이고. 그러니 다 알지. 그래서 내가 한국군이 파병 가는데 우리가 수송을 하고 싶다. 우리한테 용역을 줄 수 있겠느냐? 그랬더니 '슈어(Sure)' 하면서 아주 쉽게 답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직접 월남을 둘러보러 간 거예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5-07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0] 한진 조중훈 회장 '첫 눈에 금광 보여'

민간인 파월을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회사가 한진이라면 유휴인력을 동원하듯이 모집해 보낸 곳은 '해외개발공사'였다. 한국 최초의 '인력수출' 공식 창구였던 해외개발공사는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 석정선 차장보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보면 김종필(JP)의 오른팔로 '하극상 사건'의 주역 중 하나지만 이미 62년 5월부터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과 인력수출 문제를 논의하는 밀담을 나눴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디어맨이었다. 국가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기능공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해 전국기능경연대회를 개최하도록 했던 것도 그였다. 석 차장보는 당시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차장 심흥선 소장과 박창암 혁명검찰부장 이훈섭 합참군수기획국 차장 등과 함께 군사시찰단 일원으로 월남에 도착해 고딘디엠 대통령과 직접 극비 회담을 한 후 해외개발공사를 만든 것이다. 생전에 LA에서 인터뷰를 했던 석 차장보는 정부가 얼마나 월남전을 경제발전에 활용하려 했는지를 가감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내가 62년 5월 11일 고딘디엠 대통령을 만났는데 이건 비화지만 사실 정부 안에 청와대 안에서도 반대파가 있었어요. 장병뿐만 아니고 민간인 파월까지 반대파가 있었다구요. 극비로 진행했는데 내가 떠나기도 전인 5월 3일 이후락 공보실장이 밀사 파견을 암시하는 얘기를 해버린 거예요. 말은 월남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했지만 그걸 표면적으로만 해석할 사람이 몇이나 됐겠어요. 그 얘기 속에는 이미 밀사 파견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리가 담겨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정치권에서 소란해지고 말이지. 박정희 의장이 화가 굉장히 났는데 그런데도 일단 갔다 오라고. 그래가지고 귀국하자마자 인력을 수출할 수 있는 공식 창구를 만들자 그게 해외개발공사가 된 겁니다." -시점으로 보면 상당히 앞선 구상이 된 건데요. 민간인 파월은 66년부터 되지 않습니까. "물론 시간이 걸렸지요. 1차 파병이 64년 9월인데 처음에 LST(상륙함)를 타고 사이공 동남쪽 123km 떨어진 몽타우에 101외과병원단과 태권도 교관단이 갔으니까. 그 후에도 미국과 외교문제 전투부대 파병 문제 복잡한 일이 많았잖아요. 하여간 해외개발공사를 처음에는 순전히 월남전만 보고 인력수출을 위해 만든 겁니다. 그때 목표가 10만 명만 보내자 그랬다구요. 우리 장병이 5만이다 6만이다 하는데 기술근로자를 10만 명 보내려고 했으니 말이지요 하하하. 그 당시에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노는 사람은 많아도 기술 근로자가 그만큼 있기나 해요? 그렇지만 일단 시도를 해 보자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일단 해 봐야 알 것 아니냐 해서 시도를 했어요. 근데 막상 하려고 보니까 월남은 전쟁 중이고 우리는 월남하고 용역창구가 없고 결국 미국 용역회사에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랬더니 당장 오케이야. 한 사람당 핸들링 비용 100달러씩 받기로 하고 근로자들은 무조건 500달러씩 해서 보내기로 계약을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걱정을 하면서 불도저 운전기사를 모집한다고 광고를 내니까 하루에 1만 명도 더 몰려와요. 우리나라에 그렇게 불도저 운전수가 많을 줄 몰랐지. 근데 전부 가짜야 하하하. 운동장에 불도저 몇 대 빌려 놓고 시동만 걸 줄 알면 합격시킨다고 했더니 전부 시동을 다 걸어.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옆에 시동 거는 놈 하나만 있으면 순식간에 눈치로 다 배워요. 그걸 보면서 우리 국민은 달나라에 보내도 다 살아남을 거고 월남에 풀어만 놓으면 다 벌어 먹을 거다 해서 전부 보냈어요 하하하." 한진이 월남의 수송과 하역 시장을 개척한 것은 틀림없지만 독불장군은 아니었다. 정부가 인력지원을 했듯이 한국군 사령부의 지원도 결코 적지 않았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한진이 용역계약 만료로 미군 용역회사에 수송과 하역 일을 빼앗기게 됐을 때도 채명신 사령관이 스몰렌 사령관과 붙은 담판에서 이기지 못했으면 한진은 그것으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진출 초기부터 준비성도 없었고 허술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채명신 전 사령관도 웃으면서 엉망이었다고 했다. "내가 하노이 방송에서 하는 것을 직접 들었는데 처음에 영어로 하고 다음에 한국말로 그 다음에 월남말로 방송을 해요. 거기서 1달러에 팔려간 한국용병 괴뢰도당들이 용병으로 팔려왔다 이런 식으로 악선전을 하고 있는데 이게 전 세계에 다 퍼져 나갑니다. 그러면 나로서는 우리 장병들의 사기 문제 우리 근로자들의 사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하고 업체도 우리가 직접 보호하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구요. 그래야 팔려오지 않았다는 증명이 되잖아요. 한진이 전부 다 자기들이 잘한 것처럼 그러지만 비교를 하자면 현대는 62년에 이미 캄란에 준설공사 하러 들어와서 이동 없이 한 곳에서 공사를 하지만 특히 한진은 일 자체가 돌아다니는 것 아닙니까. 그걸 우리가 다 보호했다구요. 그런데 한진은 처음엔 물 마실 준비도 안 해 왔어요. 물이 얼마나 중요해요. 처음 해외에 나와서 그랬는지 말라리아도 있는데 모기장 하나 안 가지고 오고. 우리 장병들이 야전침대를 다 나눠 쓰고 모기장도 한 사람씩 덮게 되어 있는데 두 사람씩 덮고 한진에 나눠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쌀이 떨어지기도 해서 쌀까지 나눠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저걸(한진) 키운 겁니다." -한진은 우리 파월장병과 사령관님에게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군요. "구태여 그런 걸 내세우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했으면 좋겠어. 그때 한진의 조중훈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해요? 내가 우동 한 오라기 얻어먹은 것도 없고 우리가 한진을 위해서 간 것도 아니고 경제발전을 위해서 우리 근로자들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도와준 거지만 그렇더라도 우리 장병들이 자기네들 신변 경호 다 해 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그렇게 해서 한진이 크게 성공했으면 파월장병들한테 고맙게 생각해야 될 텐데 나중에 고엽제 환자들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돼서 환자들을 위해 지원을 좀 해줬으면 했더니 고마운 거 인정하려고 하지 않더구먼." 어쨌든 한진은 월남을 향한 시동을 걸었다. 먼저 조중훈 사장부터 나섰다. 훗날 조 회장은 월남 진출에 대해 인터뷰하는 동안 줄곧 껄껄 웃으면서 첫눈에 금광이 보이더라고 말할 때는 다소 흥분하기도 했다. "월남에 무슨 목적으로 파병을 했는지는 내가 알 필요가 없어요. 난 사업가니까. 그때 한창 유행했던 노래가 '황포돛대'라고 있었는데 노래 가사처럼 황혼이 쫙 깔릴 무렵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까 퀴논 항이라고 있는데 하역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수송이 안 돼서 배가 한 40여 척 정박하고 있더라구. 아마 그때 맹호사단이 도착하고 나서 한국 민간인으로는 내가 처음일 거예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4-30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9] '돈벌러 가자' 월남으로 월남으로

베트남 전쟁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진은 폐허로 변해 가는 전장에서 오히려 성장을 위한 금광을 캐면서 대그룹으로 승승장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사주팔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진은 당시 인천에서 서울로 또는 의정부나 동두천으로 미군 군수품을 수송하는 업체였다. 그러나 민간 기업으로서 월남전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아무리 선두업체였다 해도 일반 무역회사나 수송업체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월남전과 참전 한국군이 한진에는 은인인 셈이다. 편의상 오늘날의 한진그룹을 '한진'이라 칭하고 있지만 애초 한진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한진상사'라는 이름으로 창업했고 무역을 주업으로 했다. 그러나 곧 무역업은 부업이나 다름없게 됐다. 창업주 조중훈 사장의 눈에 해방 후 모든 물자가 인천항으로 들어와 어디론가 수송되는 것이 보이는 순간 운송업이 사업적으로 실익이 크겠다는 것을 간파하고 트럭 한 대를 구입해 물자수송에 나섰다. 이것이 본업으로 발전한 '한진그룹'의 시작이었다. 한진의 성장엔진을 가동한 인물은 단연 조중훈 전 회장과 조중건 전 부회장(당시 상무) 형제였지만 특히 조중건 상무(편의상 월남전 시점의 직책으로 한다)의 활약은 타고난 친화력과 미군 인맥을 통해 나타났다. 물론 형이 닦아 놓은 주한 미 8군 인맥도 상당했지만 조 상무의 한국군 통역장교 시절 맺었던 인맥과 미 장성들은 무시 못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 상무는 미국 버클리대학 출신이다. 정재문 전 국회의원이 버클리대학 출신으로 한국 총동문회 회장을 지내면서 한때 한국 사회에서 버클리 영향력이 제법 힘을 과시했다. 버클리대학은 미국에서도 높게 평가하는 최상위급 명문 대학이다. 에피소드지만 부근의 유명한 사립 A대학과 비교해서 말할 때 A대학은 엄청난 학비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부모보다 못난 자식'이 다니고 버클리대학은 '부모보다 잘난 자식'이 다닌다는 말도 있었다. 일본을 때린 원자탄도 버클리대학에서 만들어졌지만 인터넷을 최초로 개발하는 등 세상을 바꾸어 놓는 대학으로도 유명해 미국에서도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 명문대 출신인 조 상무는 졸업 후 모교에 500만 달러를 기부해 '찰리 조' 강의실이 별도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명사가 됐고 군부에도 폭넓은 인맥이 있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월남에서 한진이 수송으로 부를 축적하기까지 한진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은 아니다. 월남전을 경제성장의 디딤돌로 활용해야 한다는 정부의 절실하고 확고한 정책이 뒷받침되면서 한국군 사령부의 지원과 정부의 인력수출에 따른 지원 등 민간 기업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제도적 혜택까지 적지 않게 받은 것이다. 거기에 미군의 협조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한진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놓은 점도 없지는 않았다. 당시로서는 근로조건에 관한 기본적인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던 탓이겠지만 부를 축적해 가는 과정에서 근로자들 처우 문제가 불거져 월남 현지에서 스트라이크가 발생했고 귀국 후에는 KAL빌딩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무총리가 기자회견까지 열어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는 사과를 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한진이 최초로 민간 수송부대처럼 대규모 근로자들을 파월시켰다는 것은 정부나 기업으로서나 가슴 벅찬 일이었다. 민간 근로자들이 대거 월남으로 간다는 것은 월남의 인력시장을 연다는 의미가 컸고 군인이 파병되는 것과는 달리 부수적으로 챙기게 되는 경제적 실리가 상당했다. 군인에게는 정해진 전투수당과 일정한 군수용품이 투입되는 반면 한진이 시장을 열면서부터 여행 알선부터 세탁업자들까지 진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뭐든지 '외화벌이'가 가능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한진은 파병이 끝날 때까지 5년여 동안 수송과 하역만으로 1억3000만 달러가 넘는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한국은행이 발간한 1967년도 '경제통계연보'에 따르면 64년에 한국의 월남수출이 630만 달러였다. 그러던 것이 비전투부대와 전투부대가 점차 증파되면서 65년과 66년에는 1470만 달러와 1380만 달러로 각각 늘어났다. 전경련이 발간한 68년도 '한국경제연감'에 따르면 민간 수송업자들이 진출을 본격화하는 67년 한 해에만 운수와 하역 세탁업과 전기수리공 등 용역수입이 자그마치 3268만5000달러에 이른다. 허벅지가 늘씬하게 드러나는 베트남 전통복장을 입고 위문공연을 떠난 연예인들 수입과 사진사 초상화 화가들 수입까지 보태지면 더 많은 달러가 부수적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당시 저작권 문제는 없었지만 동양TV 연속극 주제가 '님은 먼 곳에'는 70년 이후부터 월남의 애창곡이 되면서 LP판이 불티나게 팔리기도 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4-23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8] '월남서 번 돈 전부 국내로 승금하라'

-듣고만 있는 겁니까?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얘기를 했으니까 심각히 들으면서도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묻지요. 그땐 나도 파병을 하겠다 해서 만나놓고 방법이 뭐냐고 물으니까 대답하기가 참 조심스럽데요. 그래서 총칼로 이길 자신이 없으면 입으로 싸워야 할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외교전을 해야 한다고 그랬지요. 존슨 대통령이 그 얘기도 심각하게 듣습디다. 그런데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닉슨 대통령이 들어와서 키신저를 내세워 모든 걸 입으로 해결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일어날 때 존슨이 날보고 그러시데. 월남전에 대해서 자기한테 그처럼 확실하게 얘기해준 건 당신이 처음이라고 이제는 뭔가 알 것 같다고 말이지. 이건 기록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러면 브라운 각서는 백악관에서 작성된 겁니까? "아니지요. 한국에 돌아와서 브라운을 불렀어요. 당신네 대통령이 모두 오케이 한 것 들었지 않느냐 들었다 이거요. 그러면서 내가 요구한 대로 하겠다고 그래요. 그러면 각서를 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사가 각서를 쓰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말이야 하하하. 워싱턴에서 당한 것도 분한데 각서까지 쓰라고 하니까 약이 오른 거지. 그렇지만 나는 웃지. 여보시오 당신은 믿겠지만 후임대사가 와가지고 나는 모르겠다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하느냐. 우린 생명을 보내놓고 너희는 약속을 안 지키고. 그러면 내가 역사의 죄인이 되는 건 물론이고 우리 장병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각서를 써야 너희 대통령이 약속한 게 남을 것 아니냐. 그래가지고 각서 안 쓰겠다는 걸 그러면 미국에 또 간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브라운 각서'예요. 펜이 잘 나오는데도 안 나온다고 내던지고 말이지 하하하. 결국 대사관으로 돌아가서 메모랜덤(각서)을 가지고 왔는데 아마 대사가 외무장관한테 각서를 써준 것이 한.미외교사에 처음이었을 겁니다." 이 장관은 브라운 대사에 대해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했지만 월남파병의 근간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 앞으로 친서를 보내기도 하고 정일권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과 험프리 부통령을 만나 여러 차례 설득한 것도 영향을 미쳤음을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브라운 대사가 직접 이동원 장관 앞으로 공식 문서를 보냈다는 것으로써 이 장관의 집요한 노력이 얻어낸 결과물임은 입증이 되는 셈이다. 브라운 각서의 정식 명칭은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對韓) 협조에 관한 주한 미 대사 공한(公翰)'으로 규정됐다. 미국이 추가 파병을 조건으로 10개항의 '군수협조'와 6개항의 '경제협조'를 포함 총 16개항을 정리해 1966년 3월 7일자로 보내온 문서는 '대한민국 이동원 외무장관 각하'로 시작되고 있다. 물론 주요 내용 중에는 당시 가장 민감했던 한국 방위 태세의 강화 국군 전반의 실질적 장비 현대화 보충 병력의 확충 증파비 부담 북괴의 남파간첩 봉쇄를 위한 지원과 협조 대한 군사원조 이관 중지 차관 제공 대 월남물자와 용역의 한국 조달 장병의 처우개선 문제 등 9개항이 포함되어 있다. 군수협조 10개항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탄약 생산을 증강하기 위해 병기창 확장 시설을 제공한다든가 막사와 독신 장교 숙소 식당 위생 오락 시설 등 부대 복지를 위한 재원 제공도 포함돼 있다. 파월 한국군 전원에 대해 1966년 3월 4일 비치 장군과 김성은 국방장관 간에 합의된 조항에 따라 해외 근무수당을 지급한다는 것도 담겨 있다. 월남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상자에 대해서는 한.미 합동군사위원회에서 합의된 액수의 2배 비율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것도 들어있다. 한국 정부가 가장 관심을 집중시켰던 경제협조에서는 '파월 대한민국 부대에 소요되는 보급물자와 장비를 대한민국에서 실행할 수 있는 한도까지 대한민국에서 구매하고 파월 미군과 월남군을 위한 물자도 최대한 대한민국에서 발주한다'고 못을 박고 있다. 수송업체와 건설업자들이 새로운 시장을 열게 됐다고 환호했던 부분도 '미합중국 공급업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월남공화국에서 농촌건설사업 선무 구호 보급 건설 등의 사업을 위해 한국인 민간기술자 고용을 포함하여 기타 용역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한다'고 분명히 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엄청난 금액이고 결과적으로 월남전 파병은 정치.외교적으로 정당성 여부를 떠나 우리 경제성장의 촉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65년부터 72년까지 8년여 동안 많은 젊은이의 희생이 있었고 그분들 덕분에 경제자립의 바탕이 됐다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오. 그 전까지 우리 산업이라는 게 뭐가 있었어요? 한국군 장비 현대화도 그때부터 가능해졌지만 군복 신발 캔 음식 막사 건설 이런 산업이 전부 발달하게 된 것 아니오? 우리 경제사적인 면에서 점프하는 디딤돌이 파월인데 조그만 건설회사든 큰 건설회사든 돈은 그 사람들이 다 벌었어요. 한진이 제일 많이 벌었고. 한일회담으로는 포철과 울산공단 같은 기간산업을 일으켰다면 파병을 통해서는 일반산업을 키운 겁니다. 재미있는 비화도 많고 아직도 공개해서는 안 될 얘기가 많지만 우리가 월남에서 번 돈을 월남에서 쓰질 못하게 해서 전부 국내로 송금하도록 했는데 그게 산업의 밑거름이 됐고 그 돈이 정말 큽니다." 실제로 70년 2월 미 상원 사이밍턴 청문회 때 포터 주한 미 대사가 참전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 이득을 설명할 때 5년(1965~1969) 동안 5억4600만 달러라 했고 미국 언론은 '한국군 5만 명 파병에 5년간 10억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이는 브라운 각서에 따른 것'이라면서 마치 미국이 공짜로 거저 준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장병들의 희생과 기술자들을 포함한 한국 기업들의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 장관도 언급했지만 월남특수를 최대한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시킨 대표적인 기업이 한진이었다. 인천에서 수송업으로 시작했던 한진이 급성장한 것은 월남전 덕분이었다. 한진을 통해 월남전이 한국 경제에 어느 정도의 기여를 했는지 조망해 보는 것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4-16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7] '각서 안 쓰면 또 워싱턴 갈 거요'

이동원 장관과 존슨 대통령 간에 오간 두 시간의 대화는 한국군 파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담길 내용도 백악관에서 타결된 셈이며 한국 정부가 계산한 경제적 실리도 사실상 큰 줄기에서 합의를 보게 되는 것이다. 6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경제사에서 분명한 획을 긋고 있는 국군 파월 내용은 89년 2월부터 집중 인터뷰 여섯 차례 수시 인터뷰 십수 차례를 통해 채록한 이 장관의 증언과 공개된 외교문서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외교문서에 나오지 않는 비사들은 대화록을 통해 재구성했다. 이 장관은 존슨 대통령이 '월남에서 미군이 상당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미국이 믿는 친구인 한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듣고 특유의 배짱과 익살스러운 논리를 펼치며 편하게 대화를 이끌었다고 했다. "각하 미국이 한국의 혈맹이고 친구고 한국이 가장 의지하는 형님인데 그런 미국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알면서 도와드리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은 보은과 의리를 소중히 하고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우리의 방위선이 위협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미군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미군을 도울 수 있도록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셔야 가능하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미국이 어떻게 도와주면 한국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거요." 여기서 이 장관은 두 가지 조건을 꺼낸다. 브라운 대사를 통해 미국에 전달하려 했던 핵심이었다. "각하 대한민국이 미국을 돕기 위해 파병을 하는데 파병으로 인해 대한민국 안보가 위태롭게 돼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월남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맹방인 한국이 안보의 위협을 받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각하.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파병에 따른 한국군의 전력 약화를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한국군을 현대화해야만 되는데 브라운 대사께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제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 대사가 잘못이오. 내가 도와드리겠소." 대사를 옆에 앉혀두고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냐고 했을 때 이 장관은 정색을 하면서 '외교 교섭은 실리추구가 목적이다. 체면도 없고 인정사정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어렵더라도 결정권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외교를 잘한다고 하는 게 무슨 소린지 아느냐. 가증스러울 정도로 억지를 부리고 뻔뻔스러운 짓을 예사로 하면서도 시침을 딱 떼고 자기들 주장을 고집하기 때문'이라면서 크게 웃었다. 물론 브라운 대사는 어금니를 짓누르며 붉은 반점이 돋을 정도로 화난 표정이었지만 존슨 대통령이 자신에게 확인하지 않는 한 끼어들지 못하게 돼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장병들 대우 문제입니다. 한국군이 생명을 걸고 미군을 도우려고 하는데 그러자면 미군이 한국군을 형제처럼 아우처럼 대접을 해줘야 용기백배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당연한 것이오. 누가 대접을 하지 않겠다고 했소?" "여러 가지 재정 지원에 있어서 브라운 대사가 차등 대우를 하겠다고 하니까 제가 생각할 때 이건 각하께서 모르고 계시는 사항이 아닌가 싶어 각하를 뵈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건 우리 대사가 또 잘못한 거요.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우는데 차등대우를 한다면 한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하게 생각하겠지요. 내가 지시를 하지요." 이것으로 협상은 끝났다. 이 장관은 '두 시간 동안 만났는데 장병들에 대한 처우문제와 한국군 현대화 문제가 30분도 걸리지 않고 해결됐다'면서 나머지는 월남전쟁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묻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국회가 들끓고 국민의 우려가 증폭되는 국가적인 최대의 이슈였지만 상대에 따라 의외로 쉽게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 국제외교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전쟁을 하고 있는데 존슨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무엇이 궁금했다는 겁니까? "그게 사실은 존슨 대통령의 불행입니다. 역사적으로 월남전에서 미국은 무엇이었느냐를 평가할 때 중요한 의문의 포인트가 되기도 하는데 미국의 개입이 세계 정치사에서 어떤 문제점을 남기고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하는 걸 존슨 대통령은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던 겁니다. 나는 그렇게 봐요. 존슨이 나한테 월남전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고요. 이건 굉장한 시사점이 있는 거요. 그때까지 존슨은 확실하게 국제외교를 통한 지지를 확보하지도 파악하지도 않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그대로 얘기했어요. 미국은 어렵다. 그러자 왜 어렵다고 보느냐면서 심각하게 물어요. 각하 월맹도 동양인데 동양 사람들은 호랑이를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호랑이인 줄 알고 처음에는 겁을 먹었는데 싸우고 보니까 미국은 종이호랑이다 이건 무섭지 않다 오래 시간을 끌면 언젠가는 종이호랑이가 터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 각하께서는 두 개의 적과 동시에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월맹과 미국 내부의 반전 세력이지요. 각하께서 월맹을 이기려면 나는 종이호랑이가 아니고 진짜 호랑이라는 걸 보여주셔야 하는데 그걸 보여주기에는 의회부터 강한 저항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렵다는 겁니다 하니까 존슨 대통령이 굉장히 심각하게 들어요."〈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4-0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6] '브라운 대사, 당신과는 말 안해'

지휘권 문제에 관한 채 사령관의 얘기다. "미군 사령관 스몰렌 대장하고 공군사령관 브라운 대장 깐깐한 라슨 장군 다 모여 있는 자리에서 지휘권 문제로 굉장히 싸웠다고요. 우리 한국군이 왜 미군 지휘 아래 들어가느냐 그건 안 된다 우리가 미군 지휘권 아래 있으면 미국을 위해서도 절대 좋지 않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심하게 언쟁을 했는데 이 전쟁이 당신네들 청부전쟁이냐? 당신네들이 월남에 영토 야심이 있어서 온 거냐? 사이공을 점령하기 위해서 온 거냐? 월남공화국을 당신들의 하나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 거냐? 뭣 때문에 온 거냐 말이지. 월남 도와주러 온 거 아니냐. 공산침략을 막으려고 자유 월남을 도와주려고 온 것 아니냐. 당신들이 전쟁의 주체냐? 당신들이 전쟁의 주체라면 월남군이고 한국군이고 다 당신들 지휘 아래 두는 것이 맞다. 그러나 당신들이 전쟁의 주체는 절대 될 수 없는 것 아니냐. 만약 주체라면 당신들은 국제 정치에서 매장 당한다. 당신들이 세계에 월남전에 대해 뭐라고 변명하겠느냐? 월남전은 미국 사람의 전쟁이다 미국의 청부전쟁이다 그렇게 말할 거냐? 그렇다면 당신네들은 침략자가 되는 것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이 도우러 왔다. 내용적으로야 우리가 당신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왔고 당신들이 원해서 온 거지만 형식은 월남 정부의 요청에 의해 한국군이 온 것인데 우리가 월남군 지휘 아래 들어간다면 정치적인 명분이 있지만 당신들 지휘 아래 들어가면 당신들의 용병밖에 더 되겠느냐. 한국 국민의 자존심이 용납할 것 같으냐. 그랬더니 아주 조용해져요. 그러더니 한국군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불만을 나타내고 비판하던 라슨 장군이 제너럴 채의 말이 옳다 나는 제너럴 채의 의견에 100% 찬동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군 지휘권은 우리가 가지고 작전을 한 겁니다. 물론 미군과 협의는 했지요." 다시 이동원 장관의 증언. - 장관님이 브라운 대사를 통해 백악관에 전달하려고 했던 것들이 경제적 실리와 국군 현대화 문제였는데 그러한 내용들이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모두 포함된 겁니까? "그렇지요. 처음에는 브라운이 아주 난처하게 나왔어요. 그러나 나는 아니지. 왜 우리 군대가 월남에 가서 싸우는데 일본 사람들이 돈을 벌게 합니까. 그 무렵 이미 일본에서 로비를 했는지 일본 제품 얘기가 언뜻언뜻 나왔어요. 그건 턱도 없는 얘기거든. 우리 병사들이 먹고 입고 쓰는 물건들 사용하는 물자들은 전부 우리 기업들이 만든 걸로 보내겠다 그게 바로 '브라운 각서' 핵심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한일회담 못지않게 어려운 외교를 했어요. 브라운 대사가 상당히 고자세고 깐깐한 분이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예를 들면 국군 현대화다 했을 때 브라운 대사가 생각하는 장비 보강은 2억 3억 달러요. 나는 언제나 최소한 '0'이 한두 개 더 붙거든? 그러니 브라운 생각하고 격차가 너무 커서 팽팽하게 싸우는 거지요. 그 돈의 차이가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브라운이 나자빠졌지. 브라운하고 나하고 되게 싸웠습니다 하하하." 이런 내용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대통령은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라고 생각하는지 어딘가에 꼭 적어 두더라고 했다. 훗날 일기장 혹은 메모장에서 나온 기록들이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것도 중요한 국정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결과적으로 보면 브라운 대사하고는 결론을 내지 못한 것 아닙니까. 백악관에서는 생각했던 대로 회신이 왔습니까? "브라운이 보고를 못하는 거지요. 자기 얼굴도 있는데. 그래서 내가 하루는 일부러 브라운을 불러서 모욕을 줬어요. 당신은 나하고 얘기하기엔 너무 작은 졸자다. 나는 당신하고 얘기 안 하겠다. 그리고 군대 안 보낸다. 그랬더니 파병을 이미 한국정부가 결정한 걸로 판단했는지 안 보낸다는 소리엔 관심 표명이 없고 자기가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인데 자기하고 얘기 안 하면 국방장관하고 하겠다는 말이냐고 비웃듯이 그래요. 미국 대통령하고 할 거라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더 웃어요. 미국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외무장관과 협상 안 한다는 거지요. 즉각 되받아서 약을 더 올렸지. 그건 과거에 그랬지 당신들이 지금 사정이 급한데 날 안 만나? 만날지 안 만날지는 두고 보자면서 워싱턴에 있는 우리 김현철 대사한테 전보를 쳤어요. 월남파병 문제 때문에 내가 협상하러 가려고 하는데 존슨 대통령께서 만나 주실 건지 물어보라고 말이죠. 그랬더니 미 국무부에서 지랄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국무장관도 있고 국방장관도 있는데 대통령을 왜 만나려고 하느냐 그거지요 하하하." 미 국무장관은 펄쩍 뛰고 대통령 비서실장도 매우 난감한 입장이었지만 결과는 만나겠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인터뷰하던 자신의 집무실에서 존슨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진이 그때 찍은 거요'했다. 존슨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했을 정도로 미국은 '월남 귀신'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 세계 최고의 강국도 권위를 꺾어야 할 때가 있군요. 국무장관부터 먼저 만나셨겠지요? "아니지 바로 화이트하우스(백악관)로 들어가 버렸어요. 국무장관이 펄쩍 뛰고 있다는데 피하는 게 좋지 하하하. 우리 대사는 자기 입장이 있으니까 국무장관부터 먼저 만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우거지상을 쓰는데 나는 그게 아니거든. 대통령하고 약속이 돼 있으면 그 순간은 격이 다르다 그거지요. 하여간 들어갔더니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윌리엄 번디 차관보 브라운 대사까지 언제 날아왔는지 벌써 백악관에 와서 앉아 있는 겁니다. 근데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앉아 있어 그런지 대사는 완전히 구석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말이야. 한국에서는 나한테 되게 큰소리치더니 말이지 하하하. 물론 나도 김현철 대사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우리 대사보다도 더 쭈그리고 있어요." - 존슨 대통령과 핵심사항은 쉽게 타결됐습니까? "존슨 대통령이 참 온화하고 논리적으로 맞으면 수용해요. 신사지요. 박 대통령의 안부까지 묻고는 날보고 하는 얘기가 지금 월남에서 우리가 상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미국이 그래도 믿는 친구가 한국인데 한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존슨 대통령의 첫 얘기예요. 그때부터 편안하게 얘기하면서도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한마디 한마디를 아주 빈틈없이 하는 겁니다. 내가 박 대통령 앞에서는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언제 미국한테 형님 대접 한번 받아본 적 있느냐고 그랬지만 존슨 대통령 앞에서는 미국이 형님 아니냐고 그래 놓고 시작하는 거지요 하하하."〈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4-02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5] '1개 사단 파병에 최소 20억불 내라'

갈수록 월남전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마치 블랙홀처럼 끝없이 빨려들 듯 확전되고 배면기지 역할을 하는 태국의 미군기지 공사는 시각을 다투며 각국의 건설업자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베트남 전쟁은 관련국들을 숨가쁘게 했고 전황은 미군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동원 장관은 전장에서 소요되는 한국군의 물자는 한국산으로 해야 한다는 것과 한국군의 현대화 안건 등을 놓고 브라운 대사를 이른바 '전령'으로 내세운 외교적 줄다리기를 팽팽히 하고 있었다. 미 대사 브라운은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다고 했다. 대사를 전령처럼 여겼다는 것은 이 장관의 뜻을 백악관에 전하라는 것이겠지만 대사는 우편배달부가 아닌 것이다. 자신도 워싱턴으로부터 훈령을 받은 것이 있을 텐데 이 장관이 미 대통령의 대답을 가지고 와야 파병을 결정하겠다고 하니 우거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협상은 해야 했고 이 장관의 요구는 컸다. 이 장관이 타계하기 전 필자에게 회고했던 브라운 대사와 주고받은 내용은 경제외교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 자체가 미공개 문서와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록을 재구성했다. "한국군을 월남에 파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방에서 병력을 빼야 하는데 대사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을 것 아니오."(이동원) "대사로서 한국의 군사적 위험을 늘 신경 쓰며 주시하고 있습니다."(브라운) "그렇게 이해한다면 파월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겠어요. 그러면 군대를 어디서 빼겠소. 전장에 투입하자면 특별히 훈련된 최상의 장병들을 빼야 하고 그래야 많은 전과를 올리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 아니겠소. 그러자면 최전방에서 2개 사단은 빼야 하지 않겠소?" "아! 대통령 각하께서도 빼기로 결정을 보셨습니까?" "빼지 않고 어디서 장병들을 선발한단 말이오. 장병을 새로 만들어서 보내나? 대통령 각하께서도 휴전선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주한 미군이 철수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파병 문제를 검토하라고 하명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데 2개 사단을 뺀다고 했을 때 그 빈틈은 뭘로 막지요? 빼면 그만큼 한반도 방위선이 허약해지지 않겠소. 우리한테는 월맹보다 더 무섭고 지독한 북한 괴뢰 집단이 있으니 말이오. 월남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대한민국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다시 말하면 허약해지는 방위선을 보강해야만 우리가 군대를 보낼 수 있겠다는 얘기요." "1개 사단에 2억 달러 정도의 방위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2억 달러? 내 생각은 한국군 현대화요. 유능하고 용맹한 장병들을 빼게 되면 담장의 벽돌 빼듯이 빼는 것도 아니고 한국군 전체가 균형을 잃을 텐데 한국군을 현대화해 놔야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 아니오. 그런데 2억 달러? 내 생각은 1개 사단에 최소 20억 달러의 방위비는 있어야 한다고 봐요. 우리 국방장관하고 협의해 봐야겠지만 아마 김성은 장관도 나하고 생각이 엇비슷할 거요." 뒤로 나자빠질 듯이 브라운 대사는 머리를 내젓더라고 했다. 그러나 이 장관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계속 요구사항을 짚어나갔고 나중에는 브라운 대사가 언성을 높이면서 '너희(한국군)들이 언제부터 콧대가 그렇게 높아졌느냐'며 판을 깰 듯이 나오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이 장관은 능청 떨 듯이 헛기침까지 하며 근엄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군 현대화 문제는 1개 사단에 최소 20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걸 명심해 주시고 그 다음은 파병에 따른 대우 문제인데 우리 장병들을 파병하면 봉급과 전투수당은 당연히 미국 정부가 미군 병사와 똑같은 기준으로 줘야 해요. 전사하면 생명의 대가도 미국 정부가 규정하고 있는 기준과 동일하게 미국에서 지불해야 합니다." "장관님은 봉급부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한국 군인을 파병하는 것이지 한국에서 미군을 파병하는 겁니까? 한국 장병들은 한국에서 주는 수준의 봉급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대사께서는 왜 그리 답답한 말씀을 하시오. 우리가 월남에 간 이상은 미국 깃발 밑에서 싸우지 않소. 그러면 똑같이 받아야지 같은 전장에서 같은 깃발에 같은 지휘관의 지휘를 받으면서 미군은 더 받고 한국군은 덜 받아요? 그렇게 되면 인종문제도 제기될 수 있지만 뭣보다 미국이 우습게 되는 거 아니오. 미국이 뭣 때문에 월남에서 싸우는 거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 아니오. 민주주의라는 게 뭐요. 평등이잖소. 그렇다면 같은 깃발 밑에서 싸우는 사람들끼리도 평등하게 안 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고 어떻게 명분을 세우겠소. 남들이 웃어요. 그러니 봉급도 같고 수당도 같고 막사도 같고 의복도 같고 먹는 것도 칼로리가 같아야 해요. 미군은 하루 20달러어치 먹고 한국군은 5달러어치 먹으라고 한다면 말이 되는 소리요?" "요리가 다르지 않습니까. 한국인들은 김치를 먹는데 어떻게 미군들하고 똑같은 칼로리를 요구합니까!" "그건 한국에서 먹을 때 얘기고 월남에 간 이상은 다르지요." 이 장관은 회고하면서도 막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브라운의 대답을 듣자는 것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만큼 경제적 실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요구더라도 백악관에 전달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이 장관의 같은 깃발 아래서 같은 지휘관의 지휘를 받으며 싸운다는 말은 협상을 위한 전략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채명신 전 사령관은 인터뷰에서 증언이 확연하게 달랐다. 지휘 문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한국군의 요구 사안이었다고 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3-26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4] '월남 문제로 각하 만날 생각마'

"각하 절대 공갈입니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뺀다는 건 시나리오조차 작성할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보다 더 유능한 외교관들과 군사 전략가들이 워싱턴에는 득실거리고 있을 텐데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 공산괴뢰들이 반드시 남침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월남전 때문에 한국에서 미군을 빼고 극동지역을 포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공갈이라는 것도 생각 못해서 우려하고 있었다는 소리구먼?" "아이고 각하께서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공갈이 아니라면 러스크 국무장관이나 번디 차관보 노레드 국무성 한국과장 같은 이들이 통사정을 하면서 서울에 와 달라고 해도 콧방귀만 뀌더니 부르지도 않는데 왜 하루가 멀다 하고 날아오겠습니까. 심지어 서울의 브라운 대사는 급하게 워싱턴으로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급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관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야." "각하 외교는 찬스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립니다만 이번 기회에 국방경제 외교경제를 통해 충분한 실리를 얻어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협상하고 실리를 좇느냐에 따라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쟁복구만 해도 수송업체 건설업체 대규모 노동인력이 필요하게 될 것 아닙니까. 우리가 파병하는 대신 월남전에 소요되는 막대한 군수물자와 일반물자까지 우리가 수출할 수 있도록 협상할 수도 있습니다." "김용태 의원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먼." "김 의원께서 그런 생각을 한다면 매우 현실적이고 옳은 시각입니다 각하!" "당신 너무 야박해!" "저는 국제외교를 하는 외무장관입니다." 마침내 박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국회를 설득하고 소신껏 해보라는 하명을 했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이 장관은 워싱턴으로 존슨 대통령을 만나러 가기 전 박 대통령과 작전을 세운 한 가지가 있었다. "각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파병 문제 때문에 서울의 브라운 대사가 각하 면담을 요청하면 그 문제는 저하고 전부 협의하도록 해 주시고 만나주지 마십시오." "대사를 만나주지 말라니." "각하께서 대사를 만나주시면 그 친구가 저하고는 협상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고 버르장머리만 나빠질 것입니다. 그러면 일이 안 됩니다. 저는 브라운 대사를 통해 우리의 조건을 워싱턴에 전하도록 하고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존슨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짓겠다고 통고할 생각입니다." "존슨 대통령이 임자를 만나주겠어?" "각하께서 브라운만 만나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존슨 대통령이 저를 만나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이 장관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외무장관으로서 철저히 실리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 자리에서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미국에 요구할 파병 조건이나 경제적 규모에 대해 박 대통령과 나눈 말씀이 없었습니까? "없을 수 없지요. 미국에 여러 가지 국군 현대화니 경제 원조니 기업 진출이니 그런 걸 설명 드리면서 내가 처음에는 너무 엄청난 액수를 잡으니까 대통령께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시데요? 그렇게 하다가 인심만 잃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하시고. 그래서 내가 미군이 월남에서 쓰는 돈을 생각해 보시라고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요구하는 건 빙산의 일각도 안 된다고 그랬지요. 그때 우리가 5만 6만 명 군대가 가지 않았어요? 근데 우리 장병 수만큼 미군 5만 6만 명이 월남에 갔다면 돈을 수십 배는 더 썼을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대통령도 더는 말씀이 없으시고 너무 심하게 공갈치지는 말라고 하시더군 하하하."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받아내기 위한 이동원 장관의 전략과 배짱은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에 '브라운 각서'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브라운 각서에 담긴 규정과 합의 내용에 근거해 파월장병들의 보수와 수당 한국의 모든 물자 수출과 기업체 진출 등이 결정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월남파병이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때도 반드시 배경이 되고 분석의 근거자료가 되는 것이 '브라운 각서'였다. 어쨌든 박 대통령의 면담이 갑자기 차단되자 예상했던 대로 브라운 대사는 펄쩍 뛰고 난리를 쳤다. 미국을 대표하는 특명전권대사가 박 대통령과 정무협의도 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외무장관에게 항의를 해 온 겁니까? "하하하 그놈 자식이 보통 콧대가 아니었거든. 청와대 비서실에서도 난감하게 됐다고 난리예요. 그만큼 미국 대사의 힘이 컸어요. 그렇지만 파병은 저들이 아쉬운데? 그래서 내가 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한 방 놨어요. 당신이 정일권 총리도 만나고 김성은 장관도 만나고 부총리 야당 당수 다 만나고 대통령까지 만나겠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앞으로 월남 문제로 각하 만날 생각은 하지 마라. 어떤 경우가 됐건 나하고 협의를 해야지 각하와 합의를 봤다고 해도 그건 무효다. 파병은 외무장관이 오케이 안 하고는 어림없다. 그랬더니 펄펄 뛰고 말이요 외무장관이 대통령 위에 있는 거냐고 핏대를 올리면서 난리야. 그럼 마음대로 하라고 외무장관 오케이 없이 한국군 파병이 되는지 당신이 재주껏 해 보라고 하하하." -수그러들었습니까? "저들이 몸이 달아 있는데? 더구나 시간이 갈수록 끝나는 게 아니라 확전되고 있었단 말이오. 결국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나오데 하하. 우선 두 가지를 백악관에 전하라고 했어요. 브라운과 협의를 하는 게 아니고 내 뜻을 백악관에 알려 존슨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오라는 식이지요. 그 두 가지가 엄청난 겁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3-19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3] '미국에 큰소리 친 적 있습니까?'

월남파병의 주무부서는 당연히 국방부였다. 그러나 해외파병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특히 한국과 혈맹관계인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파병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거기에 한국의 안보와 경제적 실리라는 최소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국방장관이 아닌 국무장관이 나섰듯이 한국의 핵심 파트너는 외무장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동원 장관이 생전에 필자와 만났을 때 털어놓았던 회고담이지만 그는 파병을 앞두고 이른바 '브라운 각서'에 담길 핵심적인 실리를 얻어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마주 앉아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언급했듯 박 대통령은 파병의 대가로 경제적 이익을 얻겠다는 게 전쟁을 치르는 우방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 장관은 실리가 최우선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맞서 언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박 대통령의 그러한 생각이 순진하고 고상한 선비적인 심성 때문이라고 회고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설득에 박 대통령이 동의했다면서 '아주 애를 먹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미국이 6.25 때 우릴 도왔던 혈맹 아니냐 그런데 미국이 고독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조건 없이 도와줘야지 우리가 경제적 실리를 챙기겠다고 하면 되겠느냐 월남이 공산화된다면 동남아 지역과 한국의 안보도 위협받을 것이 분명한데 월맹을 제압할 수 있도록 무조건 도와야 하지 않느냐 이게 그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양심이었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돕지 않았을 때 미국이 주한 미군을 빼내 월남에 투입하면 당장 우리 안보는 어떻게 되겠느냐 그것도 상당히 염려하셨지요. 그분이 생각하고 계신 걸 그렇지 않다는 논리로 설득하고 미군을 한국에서 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작전을 짜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는데 참 애먹었습니다 하하. 어떤 사람은 뭐 김정렬씨가 나섰다느니 모 대사가 나섰다느니 그러는데 전혀 아니고 나하고 박 대통령하고 단 둘이 담판을 짓다시피 했던 겁니다. 이게 월남파병 초기 때 얘기요." 월남파병을 통한 한국 경제의 부흥을 위해 미국과 담판을 앞둔 시점에서 박 대통령과 나눈 대화록을 이 장관이 회고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면 당시 청와대 안에서 얼마나 깊숙한 밀담이 오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각하 김성은 장관(당시 국방장관)과 장기영 부총리한테 파병에 따른 득실과 경제적 실리에 대해 검토를 지시해 주십시오." "임자(이동원 장관)는 득실 계산이 나오면 어떡하겠다는 게야. 임자한테 자꾸 맡겨 달라고만 하는데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내가 알아야 되겠어." "각하의 심중은 제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미군이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며 한국전쟁을 도왔는데 은혜를 갚아야지 월남에서 대리전을 치르는 거나 다름없는 미국을 상대로 경제적 실리를 챙기겠다고 해서야 되겠느냐는 말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미국이 월남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것이 국제 간의 손익계산서인데 파병에는 실리가 따라야 합니다. 국방장관과 부총리가 검토해 결론이 나오면 그걸 바탕으로 미국 교섭의 포지션 페이퍼를 작성해 해결을 보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미국이 곤경에 처했다는 걸 알면서 조건부 협상을 하겠다는 거 아니오 이 장관은!" "각하 어차피 3차 파병이 불가피하다면 우리의 젊은 장병들을 월남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라면 외롭게 싸우고 있는 미국을 지원하면서 경제와 국방 외교 면에서 충분한 실리를 얻어내야 한다는 게 저의 판단이고 계산입니다." 지금까지 끌려 다니기만 하던 한국 외교를 일시에 반전의 기회로 돌려놓을 수 있고 배짱을 부릴 수도 있는 찬스라고 본 것이 이 장관이었다. 그는 열변을 토했다고 했다. "각하 전쟁을 잘만 이용하면 시베리아도 개발할 수 있고 중공대륙에도 당당히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일본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일본이 한국전쟁을 이용해 경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많이 팔아 먹었고 얼마나 이익을 챙겼습니까. 그렇다고 욕을 먹었습니까? 그게 냉혹한 현실이고 실리외교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왕성한 힘을 가지고서도 끌려만 다니는 외교를 해서 되겠습니까. 왕성한 인력이 기업으로 보면 굉장한 담보물이듯 왕성한 전투력은 어떤 병기보다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담보가 됩니다. 우리의 왕성한 전투력이 아니라면 왜 콧대 높은 미국의 거물급들이 뻔질나게 한국을 찾아오고 야당 지도자들까지 찾아다니면서 기름기 흐르는 얄팍한 웃음을 보이고 그러겠습니까. 각하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지금까지 미국에 형님 대접 한번 받아본 적 있습니까? 미국한테 큰소리 한번 쳐본 적 있습니까? 그런 기회가 오고 있습니다. 파병외교는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각하!" "이 장관 우리가 실리를 조건으로 내걸면서 자꾸 흥정이나 하는 이미지를 주면 명분도 잃고 다 잃어. 미국은 우리가 파병하지 않을 경우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빼내 월남에 투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단 말이오. 그걸 알아야지!" "각하 그건 공갈입니다." "뭐야?" "정말 그런 생각을 한다면 미국은 아시아의 반공라인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해야 합니다. 그건 미국의 절대적인 손실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 왜 참여했느냐 하는 미국의 근본적인 명분마저 상실하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유엔 참전국 전체의 원성도 피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걸 미국이 모를 리 있겠습니까? 반공라인을 포기한다면 월남전에는 왜 참전을 했다는 겁니까?" "그게 공갈이라는 소리는 임자가 첨이구먼!"〈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3-12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2] '디엠<당시 베트남 대통령> ' 한국방문때 이승만이 파병 약속'

어쨌든 1964년 9월 22일 140명으로 편성된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제1차 월남파병 그리고 65년 2월의 공병과 수송부대 2000명 파견까지는 그나마 묵인이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0월에 파병될 대규모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파병을 앞두고 3차 파병 논의는 이처럼 집권당 내부에서부터 진통이었고 야당인 민사당의 서민호 의원은 더 극렬한 저지를 선언했다. "누구를 위한 파병인가. 미국을 위한 파병인가 월남을 위한 파병인가. 박정희 정권은 고귀한 젊은 청년들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야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은 이미 이동원 외무장관과 주한 미국 대사 브라운 사이에 이른바 '브라운 각서'가 교환돼 머지않아 한국 물자와 한국 민간업체들이 대거 월남으로 진출한다는 스케줄이 구체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역사는 비밀이 없는 일기장이라고도 했지만 전 주월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비화를 공개했다. "박 대통령 때 파월 문제가 있었지만 사실 그 전에 이승만 대통령 때 이미 파월 문제가 있었습니다. 월남의 고딘 디엠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지요. 그때 벌써 미국은 월남에 일부 특수부대 요원을 투입하고 아주 극히 부분적이지만 개입을 하고 있었는데 고딘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전투 경험이 많고 게릴라전 경험이 있는 한국의 지휘관급과 전투부대를 보내줄 수 없느냐고 요청을 했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오케이를 했다고요. 그래서 보낸다면 육군에서는 저를 보내야겠다는 논의를 마친 상황이었어요. 그때 내가 육군본부 작전과장을 거쳐 5사단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5.16이 나서 유야무야 되는가 했더니 당시 참모총장 김종오 장군이 나를 불러요. 고딘 대통령과 이 대통령이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채 장군이 가야 될 것 같다고 말이죠. 그런 비화가 있었다고요." 월남 파병은 박 대통령 때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부터 월남 측과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였던 김용태 의원과 정보부 차장보였던 석정선씨가 극비리에 월남을 방문해 파병에 따른 구체적인 협의를 가졌다는 증언에서 입증되고 있다. 월남 파병은 경제적 실리를 최우선으로 했던 박 대통령에게 누가 가장 적합한 논리와 명분을 제공하느냐는 것이 핵심이었다. 명분과 논리가 정연해야 박 대통령이 반대로 들끓는 정치권을 잠재우고 국민 설득에 나설 수 있었다. 여기에 총대를 메는 것이 이동원 외무장관이었다. 이 장관은 사실상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고 젊은 나이에 입각했지만 파병 문제도 해볼 만하다는 논리로 박 대통령의 환심을 산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이 장관은 65년 2월 27일 '플레이쿠' 미군기지가 베트콩에게 피습 당하면서 미군이 보복적인 월맹 폭격을 가속화하고 동시에 월남 후방 복구를 위해 한국 건설업체들이 대거 진출할 수 있다는 점도 활용했다. 분명히 파병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박 대통령이 구상하는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멍청하게 문제점을 나열할 장관은 없었다. 이 장관도 '문제점은 말씀을 안 드리는 거지' 하고 웃었지만 평소 개구쟁이처럼 능글맞았던 이 장관의 스타일일 수도 있었다. "두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사실 이건 중요했다고요. 첫째는 전투병력을 파병하면 국제정치적으로 손해를 본다 왜 손해를 보느냐 월남전이 인기 없는 전쟁이었어요. 비교적 미국의 고독한 전쟁이었고. 한국전쟁만 하더라도 유엔 이름 가지고 전부 미국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월남전은 어떤 의미에서 미국의 전쟁이고 유럽 국가들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인기가 없었고 미국 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저렇게 인기 없는 전쟁에 한국이 끼어들어 도와주면 그렇지 않아도 우리조차 인기가 없는데 우리의 인기가 더 떨어질 거다. 다시 말해 피 팔아 먹는다 생명을 팔아 먹는다 하는 이런 잘못된 이미지를 줄 수 있다 그게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는 점이지요. 두 번째는 전장에 나갈 바엔 이기는 전장에 들어가서 편을 들어줘야 나중에 득이 있습니다. 지는 전쟁은 편을 들어줘 봤자 별로 득도 없고 빛도 나지 않아요. 월남 전쟁은 지는 전쟁인지 이기는 전쟁인지 모르겠지만 이기는 전쟁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아주 제한된 전쟁이었고 명분도 확실하지 않은 전쟁이었고 미국에서 뒷받침하는 여론부터 분열이 되어 있었고 국제적으로 아주 고독했고. 그러니까 저 전쟁은 승리하기 어려운데 거기에 끼어들어 나중에 같이 쫓겨날 생각을 하니까 아찔하대. 그런데도 그런 얘기는 싹 빼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파월을 해야 됩니다 이런 말씀만 드리는 거지 하하하." - 박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박 대통령이 참 고상하고 순진하신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란 고상한 것만 가지고는 존속할 수가 없죠. 이건 특히 내 아이디어였는데 일본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이용했듯이 우리가 월남전쟁을 잘 이용해가지고 우리 경제를 부흥시키자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그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몇 번 그러시는 겁니다. 박 대통령이 그런 분입니다. 아주 대국적인데 상당히 순진하고 고상한 데가 있어요. 그러면서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미국이 지금 외롭게 반공전쟁을 하는 것 아니냐 한국전쟁이 났을 때도 그래서 도와준 건데 우리도 의리를 지켜서 외로울 때 도와줘야지 경제적 실리를 챙기려고 파병한다 하면 너무 야박하지 않느냐고 그런 말씀이에요. 어쩌면 박 대통령은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의리를 얘기하셨겠지만 나는 외무장관이니까 외무장관은 항상 실리를 따라야 돼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한테 고상한 것도 좋습니다만 파병에는 실리가 따라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을 드렸지요. 한참 듣고 계시더니 그럼 실리를 어떻게 챙기겠다는 거냐고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시데요? 그건 저한테 맡기십시오 그랬지."〈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3-05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1] 최빈국 한국 '전쟁통해 경제재건 실탄'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계획도 이때부터 가속도가 붙는다. 이번 호부터는 ‘박정희의 도박, 월남파병’을 연재한다. 다만 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린다. 건국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삼아야 하는가의 논란처럼 건국 60주년의 실질적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논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가 건국 후 해외 전장에 장병을 파병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가 처음이었고 파병의 성격을 규정할 때 6.25 참전에 대한 보은과 자유우방 지원 북한 도발 억제와 국방력 향상이었다. 이와 함께 경제부흥의 발판 마련이라고 했던 만큼 건국 60주년의 의미 속에 월남파병은 분명한 하나의 획을 긋는다고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1965년 2월 사이공 정부를 돕기 위해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은 약 10년에 걸쳐 아시아 여러 나라에 커다란 경제적 변화를 끼쳤다. 그중에 특히 한국은 '월남특수'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면서 경제재건의 실탄을 마련하고 '한진'이라는 이름 없던 작은 수송업체와 극동 삼환 대림 현대건설 등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해 준 게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말이다. 1966년 일본 외무성 경제국이 발표한 '베트남 평화의 경제적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 필리핀 한국 등이 베트남 전쟁으로 GNP가 평균 3% 증가했다. 69년에 발행된 '이코노믹 리포트 오브 프레지던트'는 미국의 특별비 예산이 65년 1억 달러였던 게 1년 만에 58억 달러 4년 후에는 257억 달러로 급팽창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미국의 특별비가 대부분 전쟁 비용으로 사용된 것이겠지만 필연적으로 전쟁 수행을 위한 간접비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경제 측면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뿐 아니라 세계 전역을 변화시켰다. 실제로 태국 같은 나라는 아시아권에서 최대의 경제적 수혜국이 됐다. 태국은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전략기지를 제공하면서 반대급부로 상당한 원조를 받아 사회간접시설 정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기지 사용에 따른 비행장 항만 등 미군을 위한 위탁시설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건설 수요를 일으켰다. 한국이 최초로 해외건설에 뛰어들어 태국에서 수주했던 현대건설의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이 바로 미국 원조 자금이었다. 물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필적하는 근대화 무기와 5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투입하면서도 갈수록 희생자가 늘어나고 여론이 악화되자 인도차이나반도에 국한된 지역전쟁으로 성격을 축소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예산지출로 재정적자 인플레 국제수지 악화 달러가치 하락 등이 겹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 국내 정치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은 경기가 호전되면서 집집마다 TV수상기가 보이고 님은 먼 곳에 가 있지만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 하이힐을 사 신고 미장원이 성업했다. 춤바람이 사회문제화하기도 했으나 '내 집 마련'이라는 관심사가 그때부터 국민 사이에 회자하기 시작할 만큼 '월남 달러' 덕을 톡톡히 누렸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이었다. 반면 1955년 10월 유엔 UNKRA(한국재건위원회) 특별조사단장인 메논이 '한국에서 경제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보고서를 쓴 것은 경제적 비아냥거림이었다. 메논의 부정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유엔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특별조사단이 내한했던 그 무렵의 실질적인 GNP는 60달러 언저리로 세계 최빈국 상황이었다. 6.25 이후 생산시설 파괴로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할 정도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외환보유액도 2300만 달러 정도였다. 지금은 어학연수를 위해 입국하는 한국인들에게 억지에 가까운 온갖 비용을 뜯어낼 정도로 추락한 필리핀이지만 55년 무렵만 해도 한국은 필리핀보다 훨씬 못했고 북한도 한국을 앞서고 있었다. 북한은 남침을 계획하면서도 강력한 철권통치 속에서 공업화를 진행시켜 60년 초반에 수출 2억 달러를 달성할 정도였다. 한국도 이승만 정권 때부터 경제개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제개발 계획을 세운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2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으니까 시점으로 보면 북한은 한국보다 10년 앞서 경제개발에 관심을 기울였던 셈이다. 어쨌든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외자 도입으로 산업화를 이룬다는 것이 핵심이었던 만큼 위험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외자 도입은 해외의 돈을 국내로 가져와 국내 통화량을 증가시키고 결국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통화 증가만큼의 경제성장을 해야 하고 실질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최빈국 경제개혁은 위험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필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월남파병은 외화 획득의 절대적 기회가 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은 박정희가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정치권의 논란이 가열됐지만 추진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하는 3차 파병안 논의는 집권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부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다. 의원총회에서였다. "나는 여당의원이지만 3차 파병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된다면 분명히 반대할 것입니다. 월남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전부 자기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난시켜 놓고 군대조차 보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 놓고 원군요청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 나라 특권층 자식들부터 전선에 서게 한 뒤에 외국에 파병을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자기 자식들은 안전지대에서 향락을 즐기게 해 놓고 우리나라 청년들을 나서게 한단 말입니까? 상정 자체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공화당 소장파를 대변하는 국회 국방위 소속 차지철 의원이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측근인 차 의원이 공개적으로 파병을 반대한 것은 박 대통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미국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쇼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

200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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